올해는 유독 국내 문학에 손이 가지 않은 해였다. 요즘의 한국 소설들은 등장인물들의 상처나 외로움이 비치는 잔잔한 일상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을 때마다 동시대적 우울감을 느끼며 ‘그래, 생활이란 이렇게 지리멸렬한 것이지’하고 공감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국이 시국인지라 책으로마저 가라앉은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산뜻한 에너지로 빛나는 엉뚱발랄한 이 소설이 반가웠다. 원래 책을 빨리 읽는 편이 아닌데 250페이지 가량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오로지 쾌감을 위해서 썼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책은 일단 엄청나게 재밌다. 독서를 통해 ‘재미’라는 요소를 충족시키고 싶다면 어서 이 책을 구하시길. 어떤 서사와 캐릭터를 기대하든지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책은 M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보건교사 안은영이 겪는 여러 사건들을 10개의 단편 소설로 담고 있다. 사립 M고에서 보건교사로 근무하는 안은영은 소탈한 성격 덕에 ‘아는 형’이라고 불리는 평범한 30대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에너지의 응집체(젤리)들을 본다. 단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핸드백 안에는 언제나 무지개색 장난감칼과 비비탄 총알이 준비되어 있다. 학교 복도에 가득한 사악한 젤리들을 물리치고 학생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그녀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학교에서 교사 업무하랴, 퇴마 의식 하랴, 그녀는 늘 만신창이이다. 그러나 그녀는 굴하지 않고 어떠한 보상이나 알아주는 이도 없이 악한 존재들과 맞서 싸운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영화 속 히어로들처럼 대단한 사명감에 불타거나 숭고하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투덜거리면서 욕을 하기도, 가끔씩 실수를 저지르고 만회하느라 허둥지둥하기도 하는 등 친근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모습들이 모여 안은영이라는 독특한 시민 히어로 캐릭터를 형성한다. 책을 읽다보면 주인공 안은영이 한심하기도 했다가, 응원하고 싶어지고, 나중에는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안은영처럼 순수한 선의에서 나온 친절을 베풀며 묵묵히 자기일을 하고 있는 일원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가 무너지지않고 존속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곁에는 생각보다 많은 '안은영'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소소하면서 귀여운 상상력에 감탄했다. 예를 들어 퇴마를 끝낸 안은영이 기운을 충전하기 위해 밸런타인데이에 주고받는 선물이나 사랑의 자물쇠에 손을 갖다댄다거나, “재수 옴 붙었네” 할 때의 옴이 실제로 존재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옴잡이가 세기를 넘어 태어난다던가 하는 착상들이다. 정세랑 작가의 톡톡 튀는 문체도 읽는 내내 깔깔거리며 웃었을 정도로 즐거운 체험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정세랑 작가를 알게된것은 정말 행운이다. 얼른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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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오늘의 젊은 작가 9)(양장본 HardCover) 출판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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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금새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 다 읽고 나서 \"아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라고 혼잣말이 튀어나왔네요ㅎㅎㅎ 작가님 특유의 유쾌함이 극대화되고, \'정세랑 월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걸 떠나서 읽다보면 즐거워하고 행복해지는 소설이라서 요즘 같이 크게 즐거울 일이 없는 때 다시 읽고 싶어집니다. 전 종강하면 침대에서 귤 까먹으면서 다시 읽으려구요ㅎㅎㅎ 부디 다른 작품들도 즐겁게 읽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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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로 방영 중이라 책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정세랑 작가의 톡톡 튀는 문체도 궁금하고 안은영이라는 책의 주인공이 알고 싶어집니다. 드라마로 먼저 보고 책을 읽던, 책을 보고 드라마르 보던 두 가지 모두 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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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드라마로 방영중이어서 하루만에 재밌게 다 보았는데 책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드라마처럼 안은영을 통통 튀는 캐릭터로 잘 표현했는지 궁금하고 시즌 1만 나온 드라마 뒷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보고 싶네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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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읽으면서 젤리, 무지개색 장난감칼 등등 너무 귀여운 단어가 많이 등장해서, 더더욱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ㅎㅎ tv에 드라마가 방영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본 적은 없어요. 책이나 드라마 중 하나는 꼭 봐야겠어요 ㅎㅎ 리뷰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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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 작품을 드라마로 먼저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책이 있더라구요! 그리고 그 책의 작가님이 정세랑 작가님인 걸 알게되고 \"역시 정세랑 작가님이야!\" 하고 크게 감탄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작품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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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읽었던 책입니다 다시 읽어서 기억을 되살려야겠어요 ^^ 드라마로도 나온 건 몰랐는데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하네요. 한번 챙겨봐야겠습니다 서평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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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읽고 바로 \"보건 보건 보건교사~\" 노래(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 ost)가 떠올랐습니다.ㅎㅎ 저는 넷플릭스로 봤는데 소재도 신선하고 내용도 유쾨해서 재미있게 봤는데 소설이 원작이었다니!! 책으로도 꼭 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드라마를 너무 재미있게 봐서 책으로는 어떻게 스토리가 이어져 있을지 궁금하네요! 좋은 책 리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