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첫 단편부터 몰입해서 읽었다. 그리고 첫 단편인 <마른 꽃>이 가장 인상깊었다. 평소 생각하던 부분이 아니라 그런가, 제목 때문인가. 읽으면서 조박사님이 마른 꽃으로 표상된다고 생각했는데, 읽고 나니 할머니 스스로가 마른 꽃이었다.
p34. 볼록 나온 아랫배가 치골을 향해 급경사를 이루면서 비틀어 짜 말린 명주빨래 같은 주름살이 늘쩍지근하게 쳐져 있었다. (중략) 나는 급히 바닥에 깔고 있던 타월로 추한 부분을 가리면서 죽는 날까지 그곳만은, 거울 너에게도 보이나 봐라, 하고 다짐했다.
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늙은 몸을 이렇게까지 세밀하고 현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본 적이 있나? 추하지만 그럼에도 세월의 방증이니 아름답다-고 말하는 작품이 대다수였던 것 같다. 상상이 되니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어디에서도 미학을 느낄 수는 없다. 사실 눈살이 찌푸려지는 곳은 그럼에도 상체는 괜찮다며 자위하면서도 거울에게는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부분이다. 60이나 먹은 노인이 돼서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는 어렵구나. 자기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자신과 실제의 자신이 괴리가 크면 클수록 스스로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 같다.
p41. 나는 성묘하기를 좋아했다. (중략) 거기서 느끼는 깊은 평화에다 대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큰 기쁨이나 슬픔도 그 위를 스치는 잔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결코 죽은 평화가 아니었다. 거기 가면 풀도 예쁘고 풀 사이에 서식하는 개미, 메뚜기, 굼벵이도 예뻤다. 그의 육신이 저것들을 키우고 있구나. 나 또한 어느날부터인가 그와 함께 저것들을 키우게 되겠지, 생각하면 영혼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죽음이 겁나지 않았고, 미물까지도 유정했다. (중략) 그 보장된 평화와 자유로부터 일탈할 어떤 유혹도 있을 수가 없었다.
친할머니가 성묘를 정말 중요시하신다. 정작 당신은 가지 않으시면서 아들에게는 무리를 해서라도 가라고 하신다. 얼마 전까지도 이해가 안됐는데, 아마 지금보다 젊은 날의 언젠가 저런 경험을 느낀 적이 있으시니까 그런가보다 싶었다. 나는 성묘를 가서 저런 느낌을 느낀 적은 없지만 성당에 가면 엇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현실의 고민은 부유하는 먼지가 되고 만다. 미사를 드리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나와 같은 유한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고 일상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들까지 자신의 탓이라고 발음하는 그 기도에서 힘을 얻는다. 결코 죽은 평화가 아닌거다. 남에게 잘못을 미루고 나만 평온해지는 평화가 아닌거다. 그 다짐을 듣고 있노라면 내 고민들이 잔물결이 되는 느낌이 든다. 난 생각이나 걱정이 많아 탈인데, 미사를 드리는 행위가 나한테 이렇게 도움을 준다. 그래서 힘들 때면 의지하러 성당에 가곤 한다.
-
너무도 쓸쓸한 당신 출판 창작과비평사
-
아침의 문(2010 제 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대상수상작)(5판) 출판 문학사상2010년은 파격적 문체와 서사로, 영원한 천재로서 기억되는 李箱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였다. 심사위원들은, 심사평에서 파격성과 혁신성을 중점으로 보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그에 따라 파격적인 서사를 가진 작품들에게 상이 돌아갔다.더보기
이 작품집을 읽게 된 계기는 배수아 작가에 대한 애정이었다. 배수아 작가의 <무종>은 역시나 특유의 만연체에서 나오는 긴 호흡과 이질적인 이미지의 나열로 인한 낯섦과 불편함이 묻어났다.
대상작인 박민규의 <아침의 문>은 불편하고, 어찌보면, 폭력적인 상황들을 통해 삶과 죽음의 메시지를 그리고 있다. 당선작인 <아침의 문>보다, 그가 선정한 자선 대표작인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가 더 흥미로웠는데, 구멍에 대한 여러 이미지들이 묘한 음률을 형성하여 리드미컬하게 읽혔다. 또한 남성의 상실감과 무력감이 흥미로운 사건들을 통해 표현된 점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양장본 HardCover) 출판 허블이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의 책이었다.더보기
우리는 늘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
어떤 물질도 빛보다 빠를 수 없다는 우주적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의 현상이라면 어떨까?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경계는 어디일까?
김초엽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름다운 글로 그려낸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김초엽의 이야기는 늘 상생을 전제한다. 그리고 상생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한 명의 탐구자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 이야기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출판 나무옆의자수 많은 선정도서들을 둘러보던 중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부모를 간병하며 삶을 살며 힘든 생활을 하던 평범한 사람들이 부모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기때문이다.더보기
치매가 온 엄마의 죽음을 숨기고 엄마의 연금으로 살아가는 명주, 그리고 옆집에서 뇌졸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준성의 고달픈 삶을 풀어나간다.
할아버지를 10년간 간병하던 할머니와 아버지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며 책을 읽었다. 침대에서 혼자 일어서지도 못 하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오랜 기간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밑빠진 독에 물붓기의 기분일지 상상도 안 간다. 돈이 있다면 요양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지만 가난한 서민들은 요양은 고사하고 평상시 약값을 대기도 힘들다. 한 명분의 삶을 지탱하기도 벅찬 사람이 부모까지 봉양하는 일은 사람의 양심과 효심만으로 이끌어가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뉴스에 보면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스쳐지나가듯이 볼 때에는 판사에 빙의해서 인륜을 저버린 자식을 욕하곤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나는 이 상황에 놓인다면 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 혼자 밥멀어 먹기도 힘든 상황에 통장에 100만원이 들어온다면 그 희망을 놓기 힘든 것이 살아갈 욕심이 있는 개인에게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
빛의 제국 출판 문학동네하나의 빛을 위한 제국과 여러 빛에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제국. 북에서 내려온 주인공의 삶과 생각을 하루라는 시간 속에 박진감 있게 담아 흥미진진했습니다.더보기
각 등장인물별로 그들의 심리와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읽으면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작가님의 상세한 장면 묘사, 인물의 심리 서술 등 디테일한 부분에서도 재미를 느껴 좋았습니다.
하나의 빛을 위해 살다가, 다양한 빛이 있는 사회에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 그리고 여러 장면 묘사에서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비밀스러운 일들까지, 제목에 언급된 '빛'의 비유적인 의미를 생각하며 읽으면 더 재밌을 것 같습니다. -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