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지식인이지만 나태하며 행동하지 않았던 ‘나’는 조르바와의 여행이 진행되고,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여태까지의 모습과는 다르게 조르바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에는 여자를 만나느니 차라리 책을 쓰겠다던 ‘나’는 여자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조르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하지만 ‘나’는 조르바와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라도 있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간 사업이지만, 사업 자금을 조르바에게 제공할 수 있는 여유가 ‘나’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서 젊은 층, 특히 사회초년생 및 대학생들에게는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경험을 쌓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대학 등록금 및 생활비, 졸업하자마자 어깨를 짓누르는 학자금대출 등 바다, 술은커녕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든 청춘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젊음’이라는 인생에 단 한 번 있는 특권을 온전히 즐기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바늘구멍을 통과해서 간신히 취업을 하고 나면, 또 다른 압박이 찾아온다. 물론 전 세계 청춘과 젊음에게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조르바의 말이 성립하기 힘든 구조라는 것이다. 열정과 젊음을 다 갈아 넣으면서 열심히 살아도 술 한 잔 걸칠 시간, 바다를 보러 갈 한 번의 여유조차 없이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면서 살아가는 한국의 청춘들에게 조르바의 말은 너무나 이상적이며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대상 없이 살아가기에는 이미 앞서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여기에서 오는 두려움과 강박이 청춘들 개인의 자유 의지를 구속하며, 개선 가능성이 희미한 사회적 현실이 더욱 더 젊음들을 한계점까지 몰아붙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사회적으로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양한 욕구를 포기해야만 한다. 안정된 삶을 위해서 하고 싶은 모험을 포기하고,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을 위해 희생한다. 때로는 이런 삶에 지쳐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나’역시도 우리와 크게 다른 삶을 살아오진 않았다. 하지만 조르바와의 여행을 통해 ‘인간이라는 불운한 존재는 작고 초라한 자신의 삶 둘레에 난공불락이라고 믿는 방벽을 쌓아 올린다. 그 안을 피난처로 삼아, 삶에 미미한 질서와 안정을 부여하려 애쓴다. 미미한 행복을 말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밟아 다져진 길들을, 신성불가침의 반복적 일상을 따라야 하며, 안전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424p).’ 라는 메시지를 얻는다. 이 메시지는 인간의 내적 불안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며, 우리가 자는 동안 메시지는 상징이라는 의상을 걸치고 나타나지만 정작 그 메시지를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된다. 자유로운 조르바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때로는 사회적으로 한 사람의 자유의지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인간 본성에서 비롯되는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안전하고 단순한 규칙’을 알게 되고 이후 예전의 ‘나’와는 상당히 달라진 상태로 여행을 마친다. 탄광을 건설하는 것에서 시작한 여행이었고, 탄광 건설은 실패했지만 ‘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많은 경험들을 했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자유의지를 구속하는 것들은 실제로 내가 일상 속을 살아가면서 자유의지를 꺾게 되는 수많은 원인들 중 하나이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점점 ‘책벌레’가 되어가는 나를 볼 수 있었다. 현실에 치여 쉴 시간이 생기면 잠만 자고, 사색 같은 것은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새로운 것은 시도해보기 전에 지레 겁먹고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 책 초반부의 ‘나’와 같은 모습들이 마치 책벌레 같았다. 하지만 ‘나’는 조르바를 통해 책벌레의 모습에서 탈출했다고 생각한다. 아직 현실 속의 나에게는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등장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책을 통해서 조르바라는, 어떻게 보면 요즘 같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람을 접했으니 은연중에라도 조르바의 자유로운 영혼이 나의 구속되고 묶여있던 자유의지를 풀어주는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경험이 서서히 나를 바꾸어 나중에는 ‘나’처럼 상당히 변화한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