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쓰거나 만드는 건 내가 나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예전부터 손으로 만들고 쓰는 것을 좋아하였다. 프랑스 자수, 컬러링 북, 레고 조립, 다이어리 꾸미기, 뜨개질, 글쓰기까지 방에 틀어박혀 책상 앞에 앉아 혼자 꼼지락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 하나에 꽂히면 몇 개월은 거기에 푹 빠져서 산다. 해마다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은 매번 바뀌었지만, 그 행위들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절대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작은 문구들의 힘을 믿는다.”
“나는 아직도 문구류를 활용해 손으로 직접 쓰고 붙이고 만드는 걸 제일 좋아한다. 수고로워도 즐겁고, 투박해도 따뜻하기 때문이다.”
문구가 주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슬픈 날도, 화가 나는 날도 책상 앞에 앉아 일기장을 펴고, 일기장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다이어리 중 아무거나 골라서 꺼내 아껴두었던 펜을 들고 내 마음을 쏟아낸다.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글이 아니기에 그저 생각나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여과 없이 무작정 쓴다. 또는 행복한 일, 삶을 살아갈 이유가 생긴 일은 힘들 때 다시 꺼내 보기 위해 기록한다. 사소한 날씨부터 시간, 장소, 주변 사람들, 나의 감정까지 그날에 있었던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록한다. 하루를 통째로 영상으로 담아내고 싶지만, 지나간 시간을 돌릴 수 없기에 글은 기록 도구로서 훌륭한 역할을 한다. 위로가 필요한 날에 다시 펼쳐보았을 때, 나에게도 행복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되도록 자세하게, 생생하게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키보드로 타자를 치는 것도 나름대로 빠릿빠릿한 그 맛이 있지만, 서걱거리는 연필로 종이에 한 자 한 자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시간을 음미하며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다. 손으로 긴 글을 적을 때는 팔목과 손가락이 아려오지만, 한 글자 쓸 때마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과 연필 끝으로 전해지는 종이의 질감, 내 취향껏 꾸밀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이 있기에, 종이에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내 색깔이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문구에 불과할지라도, 나에게 문구는 소중한 친구이자 삶의 일부이다. 내 일상의 대부분은 문구와 함께한다. 지금도 내 장바구니 쇼핑 목록은 문구로 가득 차 있고, 책상 위와 서랍 곳곳에는 아직 뜯지 않은 새 문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굳이 쓰지 않더라도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나에게 위로가 된다. 물론 그 위로가 그들이 직접 해준다기보다, 그들을 보며 내 스스로를 도닥이고 위로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종이와 펜에 둘러싸여 사는 삶도 꽤 괜찮다. 그들이 가진 분위기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마음이 불안한 날에는 동네 조그만 문구점을 가거나 큰 서점을 간다. 그곳에서 나는 종이의 냄새와 책장 넘기는 소리, 네모 각진 책들의 표지, 형형색색의 반짝이는 문구의 모습만으로도 그 불안을 가라앉히고, 위로 떠오른 마음의 불순물을 사라지게 해준다. 문구는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져 주었고, 이렇게 내 모든 일상은 문구로부터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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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문구(아무튼 시리즈 22) 출판 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