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각본은 소설이나 수필과는 대단히 다른 성격을 지닌 글이다. 유태오 배우는 가장 좋아하는 책이 각본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각본에 익숙해지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이유는 제공하는 힌트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감정을 자세히 서술하지도 않고 행동 지문이 눈에 그려지지도 않는다. 많은 부분을 상상을 통해 채워 넣어야 한다. 그래서 각본만 보아서는 이게 어떻게 영화가 됐지? 하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감독이 됐다 생각하고 스토리보드와 비교해보고,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읽다 보니 재미가 붙었다.
영화를 읽어낼 때는 최대한의 상상력을 꺼내야 한다. 사소한 오브제와 연출 속에서도 힌트를 얻어야 하고 각 인물의 입장에서 다각도로 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 헤어질 결심의 경우 전반부인 '산'은 형사인 '해준'의 입장에서, 후반부의 '바다'는 피의자인 '서래'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이렇게 전복된 시선 차이에서 관객은 두 사람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감정의 동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감정의 동요가 일었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특별하다.
<헤어질 결심>은 특이하게도 중국어 대사가 많이 등장하는데, 자막이 깔리지 않아 기계 음성의 번역만 듣게 되거나 아예 무슨 의미인지 알려주지 않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한 언어의 단절과 이음은 영화에서 매우 흥미롭게 작용한다. 하지만 각본에서는 모두 한국어 번역이 간체자 아래에 적혀 있다. 분명 같은 대사인데도 각본으로 읽는 것과 영화로 들은 것이 너무나도 다르게 느껴졌다.
정서경 작가가 그려내는 여성 캐릭터를 사랑하는 이유는, 모두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며 주체적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꼭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완전무결한 여성 캐릭터보다는 여러 가지 흠을 가지고 다양한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캐릭터가 좋다.
이 각본의 '서래'는 팜므파탈 클리셰를 비트는 인물이다. 전반부에서 '서래'는 '조금만 잘해주면 알아서 다 해 주는' 형사를 꼬여낸 전형적인 팜므파탈 캐릭터로 보인다. 그 꼬임에 넘어간 꼿꼿한 형사였던 '해준'은 '서래'를 위해 형사라는 직업에 대한 프라이드를 모두 내려놓는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항복 선언이다. 그러나 서래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사랑은 고작 의심을 벗기 위해 꾸며낸 것이 아닌, 훨씬 더 커다란 것이란 사실이 밝혀진다. 어떤 슬픔은 파도처럼 넘치는 것이 아닌 물에 잉크가 퍼지듯 다가온다. 서래의 사랑 역시 그랬다. 세상엔 장미 꽃다발 같은 사랑만 있는 게 아니라서 누군가는 고양이가 죽은 새를 선물하는 것 또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얼마 전 청룡 영화제에서 탕웨이가 영화 삽입곡인 정훈희의 <안개>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나 역시도 헤어질 결심을 통해서야 완결될 수 있었던 둘의 사랑이 오랜만에 다시 떠올랐다. 아직도 해준은 이포의 바다에서 서래를 찾고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