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의 저서 중 가장 추천받았던 책이어서 기대를 가지고 읽어보았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달과 6펜스>, <면도날>을 읽으며 인간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재능을 가졌으나 여성 인물을 잘 다루지는 못하는 작가라 생각했는데, 그러한 인상을 완전히 전복시켜준 글이었다. 한 인물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사랑과 욕망, 실패와 성장과 좌절,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낸 소설이었다.
아름답고 명랑한 키티는 허영 많은 엄마의 기대 속에 사교계에 등장하지만 결국 나이에 쫓겨 도피하듯 결혼한다. 지루한 결혼생활을 보내던 그녀는 매력적인 유부남 찰스 타운센드로 인해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 그러나 불륜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려는 순간 찰스는 키티를 배신하고, 키티의 정신세계는 산산조각이 난다. 아내의 배신에 깊은 상처를 받은 월터는 키티를 협박하여 콜레라가 창궐한 중국의 메이탄푸로 데려간다.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준 키티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사이에서, 월터는 매일 사투를 벌인다. (알라딘 책소개 발췌)
잔인한 대우를 받았다고 사랑이 멈출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경멸하도록 만드는, 인간의 가슴에 존재하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때 정비례로 경멸이 커진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에서 티타가 느끼던 감정처럼 사랑의 방향은 이성적이거나 친절하지 않다. 키티는 (본인의 생각이나 주위의 평가처럼) 약간은 멍청하고 허영심이 강하며, 아름답지만 무례한 여성이다. 월터가 쏟아주는 사랑의 가치를 모르는 그녀는 끝내 그가 죽을 때까지 월터를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이 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키티의 죄의식은 ‘월터가 그녀와 자신을 용서하고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동정으로 피어난다. 사랑하지 않고, 죄를 지어 용서를 구하는 입장이며, 내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키티는 손쉽게 참회하고 그를 연민할 수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가 마침내 말했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원하는 거 없어요. 당신이 조금은 덜 불행했으면 하는 바람뿐이에요.”
그녀는 그가 경직되는 걸 느꼈다.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매우 차가웠다.
“내가 불행하다니 착각이야. 당신 생각을 자주 하기엔 할 일이 너무 많아.”
메이탄푸의 삶에 감동을 받은 키티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월터의 죽음 이후 수녀들과 주위 모두의 만류로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게 된다. 홍콩이 띠고 있는 도시의 활달함을 지켜보던 그녀는 ‘지나가는 젊고 아름다운 남성’을 보며 다시 활기를 찾는다. 돌아온 후 그녀가 메이탄푸에서 그토록 경멸하던 찰스와 다시금 육체적 관계를 맺은 키티는 충격을 받아 영국으로 떠난다. 차이라면 그녀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는 것이다. 키티는 더 이상 어리석고 욕망과 충동이라는 베일 속에 갇힌 과거의 그녀가 아니다, 사람의 완성은 재탄생이 아니라 점진적인 개선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모두는 잘못을 통해 배우지 않는가?
집으로 돌아온 키티는 마침내 어머니의 억압에서 벗어난 아버지를 마주한다. 여지껏 가족을 부양하는 ‘의무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그녀의 부친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새 발령지로 떠나 그만의 삶을 시작하고자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살겠다는 키티의 말에 당황하고 좌절한다. 한 번도 가족애가 존재하지 않던 부녀관계를 돌이켜 본 키티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 용서와 가족의 회복을 위한 기회를 구하고, 부녀가 함께 떠나기로 결정하며 책은 마무리된다.
아이가 태어나 가장 처음으로 사랑을 겪어야 할 곳은 가정이다. 이 최초의 명제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그녀는 뒤늦게나마 가족애로 회귀한다. 건강하지 못한 사랑을 하고 성숙하지 않았던 키티가 어떻게 자신의 죄와 결함을 깨닫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지, 스스로를 사랑하고 실수를 포용하며 넘어지기도 하지만 마침내 올곧게 일어서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성장하는지 아름답게 담아낸 소설이었다. 사랑과 의무가 합치하는 지점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 있다. 키티는 그녀만의 평화를 발견할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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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양장본 HardCover) 출판 허블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단편을 구상한 아이디어들 모두 창의적이고, 담고자 했던 주제의식도 명확하지만 단편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깊이를 가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표면만 다루다가 넘어간 책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는 낭만적이고 다정하다. 장르가 SF인 만큼 다루어지는 내용은 우주와 외계 생명체로 확장되었으며, 역설적으로 이를 통해 인류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더욱 돋보인다. 결함을 가졌거나 소수자, 혹은 이방인의 자리에 위치한 사람들을 조명하는 시선은 친절하다. 김초엽 작가가 상상한 세계가 더욱 구체화되었으면 좋겠다고 느꼈고, 장편으로 다시 만나보고 싶다.더보기
다만 <감정의 물성> 단편은 따로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다. ‘우울체’, ‘증오체’ 등 감정을 매개해주는 상품(이모셔널 솔리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상황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정하의 이야기이다. 이 단편에서 감정을 말하는 시각이 굉장히 독특하다. 이모셔널 솔리드는 감정을 물성을 통해 감각하고자 하는 욕구를 정확히 이해하여 발매된 상품이다. 기념품이나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담은 매개물을 수집하는 행위에서 착안하여 확장한 아이디어라 생각하는데 읽으면서 정말 감탄했다.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제품을 구매했을 것 같다. 손안에 쥘 수 있는 우울이나 분노, 무력감을 통해 감정에 지배된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구매하고 싶다. 통제라는 단어에서 감정의 본질과 멀어지게 되겠지만.
이모셔널 솔리드를 런칭한 대표에게 정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부정적인 감정을 구매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변한다.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SF 단편집에서 가장 공상과학기술적인 뉘앙스가 덜한 글이었지만 감정에 대해 색다르게 접근을 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짧지만 강렬한 내용이고, 가볍게 추천해주고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은 단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