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_한강, 처음부터 살아남으려고 하지 않았던.
‘혼자 살아남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을 것이다.’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는 것조차 버거웠다. 고작 종이 한 장의 무게는 내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시간과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무게를 담은 듯했다.
시민들은 총을 들었지만 쏘지 않았다. 여지껏 역사를 배우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던 그들의 존엄성은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살인으로 얻어낼 가치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감내했다. 그 대목에서, 그들의 행동은 마치 그들이 완전무결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영혼은 그때부터 깨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까,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살아있는 영혼이 나을까. 그러나 누구도 거리로 나서지 않은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 만약 내가 그 시간과 장소에 있다면 난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나를 잘 안다. 눈 돌리지는 않았겠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군중에게서 발현되는 특정한 윤리적 파동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이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다. 당시 태어나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반 친구들을 모아 구호 물품을 직접 팽목항으로 전한 기억이 있다. 그 때 나에겐 그게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으며, 본능적으로 무엇이지 않기 위해 무엇을 했던 것 같다. 무엇이지 않기 위해 했던 첫 번째 행동이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때까지도 학생의 사회참여가 어른들에게 달갑게 비춰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위안부’ 수요집회 참여라던지, 여러 가지의 것들을 했다. 그런데 막상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내가 어릴 적엔 본능적으로 피했던 ‘무엇’이 되어가는 것인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 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거야.’
투쟁했던, 어딘가에 실존해있을 인물들은 그렇게 한 몸 으스러져라 증명했다. 나는 무엇을 증명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증명해낸 것을 나는 존중하며,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나. 삼청교육대, 군사 독재 정권과 관련된 기사를 보면 분노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음에도 고통이 뼈저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부모님을 신고해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 학교에서 자신의 부모라도, ‘대통령’에 대해서 허튼 말을 하면 빨갱이이니 당장 신고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농담처럼 건네신 말씀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린 아이를 이렇게 세뇌시켰구나, 정말 괴물이 따로 없었구나 소름이 끼쳤다.
1980년 5월. 42년 전의 그날들을 이렇게라도 새길 수 있어서, 지금이라도 새기게 되어 다행이다. 내가 이들의 후손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이다.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용기와 영혼의 파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매년 5월이 되면 다시 펼치고픈 책이다.
-
소년이 온다 출판 창비
- 1 person 좋아요 님이 좋아합니다.
-
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셨네요. 많이 들어본 책의 제목이지만 쉬이 읽어볼 생각을 못했는데, ㅁㅈ 님의 서평을 읽고 나니 한 번 꼭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저 또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학생회나 동아리에서 하는 캠페인에 참여한 기억이 있는데, 그때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그런 구호운동이나 캠페인을 하는 것을 많이 불편해하셨던 게 떠오르네요. 만약 초등교사가 되었을 때 학생들의 사회 참여에 대해 어떤 태도로 어떻게 지도해야할지 많은 생각이 들게 합니다.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
어떤 책으로 리뷰를 쓸까 했는데, 남겨주신 글 보고 ‘소년이 온다’ 북토크를 꼭 적어야겠다고 생각이 드네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정확하지 않음) 책 맨 뒤에 평을 신형철 평론가가 해주셨던 것 같은데, 펼쳐보기도 전에 뒤표지를 먼저 읽으면서부터 눈물을 흘릴 뻔했던 것도 갑자기 기억이 났네요. 추상적인 단어가 많음에도 전혀 현학적이지 않고, 오히려 가장 구체적으로 가슴에 박히는 문장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심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으셨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