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주인공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그래서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로 읽혔다.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삶과 닮아있지만 달라서다. 그래서 삶을 닮은 게 아니라 옮겨 담은 수필을 잘 읽지 않았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의 분신과도 같아 작가의 일기를 읽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불편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속속들이 알아가는 게 언제부턴가 버거워졌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누굴 만났는지 기억도 못하게 되고, 어떤 일을 겪었나, 어느 시간을 지나면서 설레었고 어느 시간을 지나면서 화를 냈는지, 이걸 떠올리는 일조차 지겨워졌다. 물론 나는 이 작가를 평생 만날 일도 없고, 다시 이 책을 읽을 일도 없겠지마는 너무도 현실적인 삶의 짐이 느껴져서 거부감이 든다. 사실 문지혁이 살고 있는 삶을 내가 언젠가는, 어렴풋이 좇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 짐을 풀어 보여 내 아메리칸 드림을 깨버린 이 책이 밉기도 하다(미국은 아니지만 어쨌든 외국이니까).
p127.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세 가지 단어로 구분했다. 아이온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무한하고 신성하고 영원한 시간, 그러므로 신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양적이고 균질한 시간, 수동적이고 무관심하며 무의미한 시간,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이다. 마지막 카이로스는 ᅟᅵᆯ적이고 특별한 시간, 구별되고 이질적이며 의미를 지닌 시간, 말하자면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는 아이온에 둘러싸인 채 크로노스 속을 살아가는 존재다. 무심하지만 규칙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시간 감옥의 죄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삶에는 가끔씩 카이로스가 찾아오는데, 이를테면 화살이 날아가거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전과 이후가 갈라지고, 한번 일어나면 결코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따라서 시간을 묻는 방법은 두 가지여야만 한다. 1. 크로노스를 물을 때: 지금 몇 시예요? 2. 카이로스를 물을 때: 그건 어떤 시간이었나요?
얼마 전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수원에 다녀왔다. 너무 행복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내 삶이 내 마음에 드는 순간, 불행이 닥쳐올 것만 같은 느낌에 너무 초조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차 탈선으로 기차가 한참이나 지연되어 정말로 불안이 찾아왔지만, 언니들은 내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플랫폼에서 기다려주고, 안심시켜주고, 다른 대책을 찾아주고, 우리 막내 밥 못 먹을까 걱정된다며 보듬어주었다. 이 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시간은 내 카이로스가 되었다.
비슷하게 만나기만 하면 모든 크로노스가 카이로스로 변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에게 너무 의지한 나머지 내가 나를 잃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서 무섭다. 누가 없거나 하루라도 못 보면 우울하다. 확인받으려고 하고, 마음을 의심한다. 분명 누군가도 지칠 걸 아는데 말이다. 내가 나를 잡아먹는다는 걸 안다.
p166. 은혜가 틀렸다. 서울의 시간은 뉴욕보다 늦지 않다. 오히려 열세 시간이나 빠르다.
서울은 뉴욕의 미래다.
내 시간을 믿지 말자. 내 시간이 그 애의 시간보다 뒤쳐진 게 아니다.
p184. 나는 소설이 꾸며 낸 이야기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소설은 삶을 반영한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소설은 삶보다 작지 않고, 소설이 삶에 속한 게 아니라 삶이야말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쓰고 있는’ 소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우주와 영원이 써 내려가는 거대한 소설의 일부임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소설을 쓴다는 건 일종의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버튼을 누르는 행위이며,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과 소설은 둘로 갈라져 다른 이름으로 저장된다.
저 위에 말에 내가 문득 얼마 전 일이 떠올랐는지, 왜 소설이 불편했는지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