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별인사(밤하늘 에디션) 작가 김영하 출판 복복서가 님의 별점
    보고 싶어요
    (0명)
    보고 있어요
    (1명)
    다 봤어요
    (0명)
    책 모임에서는 모임을 마무리 지을 때마다 ‘책 장례식’이라는 것을 한다. 한 번 읽은 책은 웬만하면 다시 펼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릴 적엔 마음에 들었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장례식을 치러주지 못하겠다. 책을 읽으면서도 문장 하나하나를 몇 번씩 곱씹어 읽었다. 몇 년이 흘러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되었을 때 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궁금해지는 책이다. 김영하 작가님의 책을 네 권 째 읽는 중인데, 읽을 때마다 같은 작가가 쓴 게 맞는지 놀라울 정도다.

    p99. 수억 년간 잠들어 있던 우주의 먼지가 어쩌다 잠시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해 의식을 얻게 되었고, 이 우주와 자신의 기원을 의식하게 된 거야.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잠깐을 이렇게 허투루 보낼 수는 없어.

    ‘나’의 기원을 곱씹어 보는 문장으로 읽히다가도, 인간 관계에 얽힌 진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게 되었는가. 나는 너를 마주하며 어떤 의식의 체계를 재정립하는가. 내 일부가 너를 만나 어떻게 변화하며 날 어떻게 의식하게 되었는가. 선이가 민이에게 이 말을 건넬 때, 어떤 인간보다도 온전하다고 하는 말이 슬프면서도 따뜻해서 여러 번 읽었다.

    p135. 그냥 얼음과 물일 뿐인데, 왜 이게 이렇게 가슴 시리게 예쁜 걸까? 물이란 게 수소와 산소 분자가 결합한 물질에 불과하잖아.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것을 아름답게 느끼도록 만들어진 걸까?

    우린 유약해서. 너무 작고도 깊은 존재여서.

    p135.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장면을 거듭하여 되돌려보곤 했다.

    아직 철이가 인간이라고 여겨질 때다. 이 문장에서 철이가 인간이 아님을 확신했다. 저건 기계가 테이프를 되감을 때나 쓰는 말 같다.
    이 소설은 여느 SF 소설과는 많이 다르다. 사실 김초엽 작가가 SF로 각광받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맥락이 부족한 자극적인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연륜이 부족해 읽으면서 책을 음미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작별인사>는 다르다.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만들고, 주인공의 정체에 혼란을 주어 내 존재 자체에도 의문을 갖게 만든다. 기계의 입장이 되었다가 인간의 입장이 되었다가. 그 시점을 달리하는 것이 매번 새롭고 즐거웠다. 책을 읽으면서 질문을 던지게 하는 이 책이 너무 반가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별로 사건이 시작하는 것도 좋았다. 아빠와의 작별, 나를 억압하던 것들로의 작별, 소중한 이들과의 작별. 이러한 것들은 예고 없이 찾아왔지만 선이와 철이의 작별은 예정되어 있었다. 만날 때 안녕, 헤어질 때 안녕- 하는 것처럼 작별을 하기 위해 선이를 만나러 간 게 좋았다. 만남의 안녕도, 헤어짐의 안녕도 모두 작별인사였다. 제목의 작별인사는, 정말로는, 단 한 번 밖에 없었다.


    p222.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우리가 그전에, 그러니까 내가 나라는 것을 알고, 네가 너라는 것을 잊지 않았을 때, 어디선가 꼭 다시 만날 것만 같아.

    나는 창피하게도, 가끔 내가 나인 것을 잊어버린다. 오만하게도, 누군가 내가 누구인지를 나보다 더 잘 알아줬으면 한다. 어쨌든 주인공들은 끝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탐색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선이의 이 말이 철이를 생애, 그러니까 인간-휴머노이드-인공지능의 모든 과정을 보듬어주는 말 같다.

    p268. 인간의 존엄성은 죽음을 직시하는 데에서 온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는 죽음을 직시하도록 노력하는 것 같다. 외람된 말이긴 한데, 아무리 내가 절벽 끝까지 내몰려도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오히려 그 최후의 보루가 원동력이 된다.

    p275.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내가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이유를 이렇게 멋지게 설명해줘서 너무 감사하다. 누군가 내게 책 읽는 게 재밌냐고 물어보면 내가 하지 못한 경험들을 간접적으로나마 할 수 있어서라고 답한다. 내가 읽는 소설 속 가짜 사건들을 보고 드는 모든 감정들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게 허무맹랑하더라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다가 갑자기 초등학교 도서실 맨 끝 왼쪽 책장에 꽂혀있던 <프린세스의 천일책> 생각이 났다. 제목이 좀 그렇긴 한데, 신분의 한계에 굴복하지 않는 일개 시녀의 모험이 담겨있다. 다른 장면은 모르겠고 탑에 갇힌 공주를 먹여 살리기 위해 굳은 요거트를 녹여 물에 타 주던 장면, 늑대 족장 앞에 용감하게 나서서 공주를 지키려던 장면이 떠오른다. 아마 선이를 보고 이 시녀가 떠오른 것 같다.
    더보기
    좋아요
    댓글 1
    • 저도 엄청 공감을 하는게 김영하 작가를 좋아해서 자주 읽는데 읽을 때마다 같은 작가가 썼는지 놀라워서 가끔씩은 잊고 그냥 읽기도 하고 있어요. 이 책은 선물받아서 읽고 있는중인데 한번 읽은 책은 웬만하면 다시 펼칠일이 없다는 말에 공감이 가요. 저도 좋아하던 책은 2~3번씩 읽으면서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즐기곤했는데 지금은 못하고 있는데 아쉽긴하네요. 김영하 작가의 책들은 너무 좋은거 같아요. 추천해주셔서 감사해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