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열 명이 내 죽음을 진심으로 기릴 수 있는 삶을 살기.’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간 장례식에서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내 마지막 꿈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열 명만이라도 나를 기억해준다면 그것만큼 안온한 죽음이 없을 것이라 매번 생각한다. 그 열 명은 모두 나를 사랑해야 한다. 어떤 사랑의 형태든 상관 없다. 우정, 존경, 열정 등. 사람들이 문득 세상에 없는 나를 떠올렸을 때 아,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었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었지 하고 한 번쯤 곱씹어 줬으면 한다. 문득 일어나서 목적도 없이 나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나를 기억해 줬으면 한다. 텅 빈 느낌이 때로는 그들을 엄습할지라도, 나를 생각하며 공간을 채웠으면 좋겠다.
내가 어렸던 탓일까, 모두 검은 옷을 입고 눈시울을 적시는 것을 보며 장례식은 사실 죽은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죽은 사람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생전에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좋아하는 음식을 나누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례식이 죽은 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을 위한 의식이라고 여겨졌다. 눈으로 본 장례식은 온통 검었으며, 그래서 내가 처음 살갗으로 느꼈던 죽음은 ‘검은색’이었다. 내게 있어 죽음은 태어나서 처음 목으로 넘기는 뿌연 모유를, 삶의 반직선을 선분으로 매듭짓는 지점에서 검은색으로 들이키는 그림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니면 검고 끈적한 액체가 가득한 욕조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 그림이거나.
그럼에도 나는 잘 죽기 위해 산다고 생각한다. 또 행복은 잘 죽는 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최상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각자의 삶이 다채로운 것처럼, 죽음도 다채로운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린다.’ 어찌 보면 반의어로 보이는 두 단어이지만, 내게 있어 두 단어는 동의어에 가깝다. 나는 내 삶과 죽음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매 순간 나를 세상에 던지려고 노력한다. 계(系)의 중앙에 ‘나’라는 별을 두고 천체가 나를 중심으로 공전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이 천체 안에서 중앙의 별은 오직 나다. 나는 천체의 중심으로써의 일을 한다. 가슴이 끓는 일을 하려고 하고, 순간을 즐기려 노력한다. 다양한 감정들은 내 혀 끝에서 터지는 건전지가 된다. 입 안 가득 행복을 담은 파란색, 질투를 담은 빨간색, 우울한 회색,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검은색, 애정을 담은 분홍색. 형용하기 어려운 각각의 빛깔을 담고 있다, 어떤 색이더라도, 나는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 차곡히 쌓아 음미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별’다운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 죽음에는 크게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의에 죽거나, 타의에 죽거나. 전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태어남을 스스로 정하지 못했으니 죽음은 스스로 정하고 싶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주도적으로 삶을 끝내려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는 것과 죽고 싶다는 것이 동의어는 아니다. 삶을 그만두어 모든 것을 멈춰버리고 싶은 거다. 이 상황을 더 이상 감내해 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건 타살에 가깝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가 죽음을 실패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거다. 목숨을 끊고 싶은 것이지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죽음의 두려움이 그들을 마지막 순간에 잠식해 버린 것이다. 나는 그들의 용기가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철망을 탈출하는 표범을 막지 못할 거라면 철망을 없애버리자. 그들은 목숨을 걸고 마하의 스피드로 달린다. 표범의 우울한 눈빛은 서늘하게 우리를 응시한다. 사살당한다 할지라도, 표범은 우리를 탈출한다. 그들은 죽음에게 절대 잡히면 안 된다. 사방은 까맣지만 그들의 눈은 형형히 빛난다. 그러나 도착지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헤맨다. 서글프다. 나는 우리에 갇힌 표범이 되어 철망을 탈출하는 표범들을 볼 때마다 안락함과 배덕함을 동시에 느낀다.
표범을 죽을 때까지 표범이어야 한다. 유려하게 바람을 가르고 자유롭게 달려야 한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신이자, 신도여야 한다. 그들의 죽음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표범에게 경제적 규칙을 운운해 그들의 고고함에 상처를 내는 것 같지만, 차라리 자살을 성공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자본주의’가 죽음에도 적용되어 있으면 좋을 텐데 싶다. 예컨대 자살 용품을 파는 상점처럼 말이다.
파리의 골목에는 가문 대대로 자살 용품만을 판매해온 상점이 있다. 가문 사람들의 핏속에는 자살의 넋이 흐른다. 상점 안에는 청량음료 대신 독약이, 샹들리에 대신에는 영안실용 조명등이, 우아한 나이프 대신에는 동맥 절단용 면도날과 할복자살용 단도가 있다. 그들이 운영하는 가게에는 유구한 고전적 자살 도구에서부터 기발한 자살 방법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관한 모든 상품이 총망라되어 있다. 완벽한 죽음을 위한 백화점이 따로 없다.
죽음에 대해 모든 것을 갖춘 ‘자살가게’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십오만 명이 자살 시도를 하는 가운데 무려 십 삼만 팔천 명이 실패를 한다.
죽지 않는다면 전액 환불!”
그들은 죽음을 완벽히 자본으로 여긴다. 죽음까지 자본으로 다뤄진다. 허망하다. 자조적인 웃음을 짓게 만든다. 누군가에게는 미소가, 누군가에게는 조소가 되겠지만. 나는 자조적으로 웃고 만다. 이 웃음은 곧 조소로 변한다. 죽음을 통해 번영해 온 이 가문이 변화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뿌연 모유를 들이킨 것이다. 막내아들 알랑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핏속에 자살의 넋 대신 행복이 흐른다. 삶을 장밋빛으로 보면서 인간의 고질적인 고뇌를 달랜다. 사람들의 죽음을 먹으며 승승장구해온 이 가업은 알랑을 통해 ‘끔찍한’ 삶의 희열과 마주친다.
가족들은 삶의 희열을 견딜 수가 없어 알랑을 군인학교로 보낸다. 알랑이 집을 비우는 동안 어느덧 가족은 그의 존재를 그리워하게 되고, 이제 그가 돌아왔을 때 자살가게는 희망을 파는 가게로 둔갑한다. 알랑은 가족들이 행복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을 본다. 자신의 숙명을 이뤄냈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가족들 앞에서 투신한다. 투신은 그가 성공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자살의 띠를 끊어낸 마지막 자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살로써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완벽했다. 처음에는 태양계라고 인정조차 할 수 없는 명왕성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가족들의 태양이 되었고, 반짝반짝 빛을 내는 별이 되었다. 그의 삶의 반직선이 선분으로 끝맺는 날은 누구보다 난만하고 찬란했다. 멋진 죽음이었다. 행복을 잠깐 맛보게 해주고, 가족들에게 씻기지 않는 죽음의 트라우마를 남겨주었다. 행복을 알기 전 가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었겠지만 지금은 절망 그 자체이다. 알랑은 완벽한 표범이었다. 작고 왜소한 소년의 그림자는 날렵하고 검은 표범일 것이다. 반절밖에 없었던 표범의 그림자는 땅바닥에 추락하며 완전한 형태를 갖춰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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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가게(양장본 HardCover) 출판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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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정반대의 개념인 \'삶\'과 \'죽음\'을 동일선상에 놓다니.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쉽게 이야기하지 않을 뿐입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언젠가 죽습니다.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생각할 수 있을 때 생명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완성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대한 훌륭한 문학적 묘사와 죽음을 통해 바라본 삶의 자세가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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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는 책인것 같아요. 과연 내가 죽으면 진심으로 슬퍼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삶을 살고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듭니다. 많은 관계보다는 소수의 진중한 관계를 만드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