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스트(세계문학전집 267) 작가 알베르 카뮈 출판 민음사 님의 별점
    보고 싶어요
    (0명)
    보고 있어요
    (1명)
    다 봤어요
    (1명)
    역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반복되는 주기가 있다고들 말한다. 누구도 무엇이 어떻게 되풀이 될 지는 모른다. 페스트가 어쩌면 코로나로 돌아온 것처럼 말이다. 폐쇄된 도시에 격리된 주민들은 극한의 절망을 마주한다. 내일을 그릴 수 없는 삶, 인간을 구원해주지 않는 신, 치유 없는 의학, 이타심의 탈을 쓴 이기주의. 특히 사랑이란 미명 아래 팽배해진 이기주의는 신체뿐만 아니라 인간의 당위와 실체에도 출혈을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아래서도 주민들의 ‘삶’을 위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러한 인간의 의지를 보며, 재앙에 대한 태도를 재정비하고,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는 질병을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자랐다.

    등장인물들은 각 계층의 대표성을 띈다. 서술자이자, 중심인물인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페스트에 앞장서서 맞선다. 리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어떤 여자가 죽는 순간에 ‘안 돼!’라고 외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나는 있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어요. 죽음에 익숙해질 수는 없다는 것을요. 그때는 나도 젊어서 내가 세계의 질서 자체를 혐오한다고 생각했지요. 그 후에 한층 더 겸허해지긴 했습니다. 다만,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더군요.” 이 말을 읽고 의사의 직업적 숙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초반부에서는 환자들에게 병명을 통보하고 돌아서는 리유의 모습이 냉정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평정을 잃고 외치는 모습을 보고 그도 페스트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파늘루 신부와 죄 없는 아이가 페스트에 대한 고통으로 몸을 비트는 모습을 보여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부분에서는,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기 위해 직업을 선택했으나 누구보다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봐야 하는 절망감과 무력감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래서 페스트가 끝나고 사람들이 해방감을 맞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유만은 고독하게 제 자리로 돌아간 것 같다. 사람들은 제각기 그 속에 페스트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리유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스트 전의 삶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리유는 끝까지 페스트에 반항하고, 겉으로만 보이는 평화에 반항한다. 반항의 아래에는 ‘긍정’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긍정은 희망과, 이겨낼 수 있다는 의지이자, 행복에 대한 조바심이다. 작가 카뮈는 ‘Cogito ergo sum.’을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로 해석한다. 생각이 반항으로 바뀌고, 그 주체는 ‘나’에서 ‘우리’로 바뀌었다. 그래서 내겐 리유가 카뮈의 거울이자 또 다른 자아로 비춰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이자 나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던 인물은 페스트로 인해 오랑에 발이 묶여버린 무용수 장 타루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가피한 이기주의를 보여주는 대신 보건대를 꾸려 최선을 다해 페스트와 맞선다. 누구나 기피하는 일을 도맡아 묵묵히 할 일을 해내는 모습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리유와 달리, 그는 의무감을 지닐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의무감 없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에 뛰어든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다가 책의 후반부에 리유와 타루가 페스트에서 도망쳐 잠깐의 해방감을 만끽한 시점에서 타루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의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점잖은 방법으로 살인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판사로써 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고, 그런 것들을 자랑스레 여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타루는 방황한다. 결국 그는 자유로운 무용수로써의 삶을 산다. 그 과정에서 오랑에서 페스트를 만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죽음에서 사람들을 멀어지게 한다. 페스트에 감염되자 자신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페스트가 끝나갈 무렵 다들 해방감과 다시 원래의 삶을 되찾을 수 있다고 희망을 가졌을 때 죽음을 맞이한 터라 더욱 비극적이었다. 타인의 죽음에는 날이 서 예민했던 모습을 보였던 그이지만, 정작 자신에게 닥친 일에는 덤덤하게 반응하는 타루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그렇게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삶을 산 이유가 단순히 아버지의 직업적 소명 때문임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분명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 형별을 받아들여야 한다.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피해를 입히고 사회의 규범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타루의 입장에서 고민하다가, 사회의 규범과 그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연 국가가 목숨으로써 심판을 내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회의 구성원 전부가 참여해 결정하지도 않은 사회의 규범은 누가 만들었나? 법은 사회의 안정성을 위함인데 범죄자도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사회의 구성원이지만, 범죄를 저지른 이후에는 법의 테두리 안에 있기를 자의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사회가 범죄자를 지켜주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파늘루 신부는 덕망 있는 오랑의 종교 인사이다. 처음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이러한 시련은 신을 믿지 않고 죄를 사함 당하지 못해 신께서 내리신 벌이라고 열정적으로 설교한다. 이 부분이 특히 오늘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을 때,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한다. 물론 거기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다시금 의지를 서로 북돋는 것은 필요하고, 일시적으로 사람들에게 안정을 찾아주는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설교의 내용은 의문스럽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죄를 지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어린’ 아이들이다. 순진하고 완전무결하다.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있던 종교에 대한 의문점을 책에서도 그대로 담고 있다. 심지어는 의심마저 불러온다. 파늘루 신부는 누구보다 독실했으나, 페스트에 걸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목도하고 태도가 바뀐다.
    “내가 증오하는 것은 죽음과 불행이라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든 원하시지 않든 간에 우리는 함께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하고 그것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느님조차도 이제는 우릴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파늘루의 원래 말 대로라면, 죽음과 불행마저도 신이 우리에게 내리는 형별이기에 달게 받아들여 죄를 씻김당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를 증오한다고 말한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서 확고한 결의가 느껴졌다. 평생을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 살아왔던 사람이, 눈 앞의 어린아이를 보고 자신의 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위해 결단을 내리는 태도는 가히 존경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파늘루는 결국 페스트로 죽어갈 때 의학을 거절한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으로 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절망적으로 손에 십자가를 그러쥔 채, 죽음 자체는 무관심하다는 듯 숨을 거둔다.

    내가 조망한 세 인물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반항한다. 리유는 눈속임과 같은 평화로움에 반항하고, 타루는 정의를 위해 왕도에 반항한다. 파늘루는 심지어 자신의 신념과 생에 반항한다. 이성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추상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옳은’ 행동들은 사람을 살린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는 오랑의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하지만, 결국 오랑을 떠나지 않는다. 그동안 이 도시를 탈출하겠다는 맹목이 사랑을 압도했으며, 이곳을 떠난다는 것이 곧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덧붙여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책을 읽으며 나는 랑베르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코로나를 경제적 논리로만 따져보았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서 회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언뜻 보기에 전 세계를 팬데믹으로 몰아넣은 이 질병은 나와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스스로를 출구 없는 터널로 몰아넣는 것과 같다. 페스트를, 코로나를 물리치기 위해 매일을 성실히, 진심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코로나에 대응하기 위해서 최전방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그러한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일상을 되돌려주기 위해 밤낮없이 매달린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써 누군가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합리에 반항하고, 희망에 긍정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제를 보고, 오늘 반항하여 밝은 내일을 그리고자 한다.
    더보기
    좋아요 1
    댓글 1
    • 1 person 좋아요 님이 좋아합니다.
    • 서평을 보면서 정말 놀랐습니다. 페스트라는 책에 정말 집중하여 온몸으로 책을 읽으신 것 같다는 생각을 받았어요. 리유와 타루, 파늘루 신부를 보면서 저도 많은 생각이 드네요. 특히 리유에 대해 서술해놓으신 부분을 보니 제가 본 다큐 하나가 생각나요. 다큐는 수의사에 관한 것이었는데요, 동물을 살리는 일을 하는 수의사가 동물이 엄청나게 다쳐 회생불가능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동물에게 직접 안락사 주사를 주입하는 장면이 나왔었는데요. 그 수의사 분은 이럴 때마다 수의사로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든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 장면에선 저도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페스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코로나 이전의 삶은 되찾을 수 없다는 현재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리유나 타루, 파늘루 신부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페스트에 묵묵히 맞서서 싸웠던 것처럼, 저도 저만의 방식으로 위기 상황이 왔을 때 저만의 방법으로 묵묵히 맞서서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