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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 룰루 밀러 출판 곰출판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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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가. 저자는 질곡의 세월을 견딘 애나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묻고 있다. 고독함에 취해 어둑한 밤길을 걷노라면, 스스로에게 금치산자를 명하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게끔. 어릴 적 작가는 아버지에게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하고 묻는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순수해서 잔인한 대답을 한다.

    “의미는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 같은 존재는 없어!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넌 중요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

    명랑하게, 이런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했다. 부끄럽지만, 내가 밤의 사금파리를 짓씹어내며 걸을 적 떠올리곤 했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버지는 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동경이나 낭만 대신 잔혹함을 일깨워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누구보다 낭만적인 인생을 살았다. 작가의 어머니를 위해 매일 아침 커피를 내려주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헌신적이었다. 인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그의 인생을 지탱하는 거대한 축이었다. 오히려 그 축이 아버지의 삶을 견뎌내게 해 주었다. 그렇지만 작가는 아버지의 답변과는 달리, 자신이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무력해 하며 아버지처럼 대범하게 살지 못함에 괴로워한다. 그녀는 방황하다가, 생물 분류에 인생을 바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분류학자에게 매료된다. 그의 업적은 의미가 없음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투쟁의 증표였다. 모두가 무의미하다 손가락질하는 그의 삶이었지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끈질김으로 삶을 개척해나간다. 이에 일종의 장엄함을 느낀 작가는 데이비드 조던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고자 한다.

    목적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자연을 향한 순수한 열망은 데이비드의 인생의 지침을 바꿨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러한 맹목적인 데이비드의 인생이 얼마나 자기기만 적이었나를 알고 있다. 그가 그렇게나 추앙하던 루이 애거시의 동상이 지진으로 인해 머리부터 바닥으로 고꾸라졌을 때는, 알 수 없는 희열감마저 느껴졌다. 우스꽝스럽고. 급소를 찌르는 장면이다. 어쩌면 룰루 밀러도 이때부터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데이비드의 그릇된 집념은 그저 무너져내리는 돌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데이비드는 우생학에 열광했고, 물고기를 분류해 인간사에 기여하고 싶다는 미명 아래 많은 이들을 착취해서 그들의 성취를 앗았으며, 권위를 지키기위해 누군가의 죽음을 묵살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라는, 견고한 거짓말을 보호막 삼아 그 안에서 서슬퍼런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가 이룩해낸 업적(알려진 물고기의 1/5을 찾아낸 일 등)을 생각해보자면 그러한 실책이 과연 그렇게 나쁜 일인가, 자기기만이라는 게 괜찮은 연료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이는 낙천성을 방패로 삼아 스스로에게 또 다시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나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 긍정적 착각이 될 수 없으며, 긍정적 착각을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게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된다. 데이비드의 방향타를 슬쩍 밀어 그가 경로를 이탈하게끔, 그토록 파멸적으로 경로를 벗어나게 만든 개념은 거대한 음모가 아니라, 그 작은 오만과 긍정적 착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그가 우생학에 빠져버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옳다고 믿었던 우생학에 의해 애나는 삶의 많은 것들을 빼앗겼다. 수용소로 끌려가 학대당하고 강간당한 일, 정신 지체자 취급을 당한 일, 온몸이 부러지고 생식기를 절단당한 일들을 겪고도 그녀는 삶의 소중함을 믿고,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만큼 다른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당하지 않게끔 보호해주고, 사랑을 주고, 사랑을 하는 법을 알려준다.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가.’ 애나도 경쾌하게 답변하진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쾌함을 가까이하고 싶어 하며, 내면에서 만들고 싶어 하고, 아무리 멀고 넓게 찾아보아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함이 든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나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귀중한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 오만한 것이라 생각했으며, 그렇기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의심했다. 당신은 나에 대해 어떤 것을 알기에 나를 사랑한다고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가. 세상에서 가장 낙천적인 감정이다. 아무런 수고 없이도 저절로 습득되며 정신에 우울함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해주니 말이다. 그렇지만 오만한 것은 나다.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놓쳤다. 어쩌면 지금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을 것이며, 긍정적 착각이라 불리는 것을 연료로 삼아 내 착각을 방해하는 것을 공격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악한 생각이 속에서부터 무럭무럭 자라나면 단칼에 이를 잘라버릴 힘을 얻게 됐다. 나는 그동안 보호막을 핑계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그를 좇는 룰루 밀러를 통해 내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마음에 이름 붙일 수 있게 됐다.
    자, 이제 남은 일은 무엇인가. 원인을 찾아 명명했으니 이제 그 라벨을 떼어내면 된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상처 주지도 않을 거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을 거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나, 룰루 밀러의 아버지는 나를 아름답고, 장엄하고, 대범한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 내 안에, 나를 중히 여겨주는 사람들의 안에 있다.

    의지적인 자세로 책을 읽다가 만나게된 마지막 장의 이름은 ‘Deux ex machina’이다. 그리스 희곡 중에서 마지막에 나타나 모든 것을 결론 내리는 신의 이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에 시대>에도 이 신이 다른 말로 언급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만일 정말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다면 모든 것이 편할 것이다. 곤란해지면 신이 내려와서 모두 처리해 줄 테니까. 그렇지만 그런 신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신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 정도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는 우리가 명명하여 분류하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어떠한 물고기도 우리가 갑자기 물 밖으로 꺼내어 들고 괴상하고 긴 학명을 붙인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는다. 물고기는 에테르적 차원에서 우리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있든지 말든지 물고기는 그냥 물고기이다. 물 밑에서 물결의 시간을 온몸에 새기며 유영하는 그 아름다운 생명체.
    나는 스스로가 턴테이블 위에 올려진 레코드판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레코드판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려면 바늘을 올려 긁어야만 한다. 그렇게 상처를 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러한 자기연민과 자기기만에서 벗어날 때다. 밤의 사금파리를 짓씹어내지 말고, 입 속에서 부드럽게 녹여낼 때다.

    이 책을 읽은 지금, 누군가 삶의 의미를 잃어 스스로에게 금치산자를 명하려 한다면 자신있게 말해줄 테다. 어떤 비는 너무 빽빽이 내려 숨 쉴 공기조차 땅바닥으로 메다꽂지만, 그래도, 그렇게 세차게 내리는 비는 소나기일 뿐이라고.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고. 바다는 부서지면서도 내내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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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의 묘약 작가 김화영 출판 문학동네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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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때문에 해외 여행은 커녕 국내 여행도 가는 데에 거리낌이 있다. 그래서 책을 통해서 내가 모르는 다른 세상을 접하고 있다. 특히 여행 수필을 읽으면 작가가 여행을 하면서 맡았던 냄새, 보았던 빗깔, 손가락 사이를 스쳐지나가는 바람까지 함께 느끼는 기분이라 해방감이 든다.

    '움직임 속의 짧은 머무름, 그것이 삶의 기쁨인지도 모른다. 왼발이 앞으로 나가고 오른발이 아직 뒤에 있을 때 그 중심에 머무는 몸의 짧은 순간, 전신의 모공을 열어 빨아들이는 세상의 빛과 냄새와 소리와 촉감, 그것이 여행이다.'

    작가는 여행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아무리 계획을 해도 과연 내 앞에 무엇이 닥칠지 모르는 설레임, 두려움 때문에 여행 좋아하고, 기쁨을 느끼고는 하는데 그 특유의 붕 뜬 느낌을 온기 담긴 말로 풀어낸 이 부분이 가장 좋았다.

    고등학생 때 심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에 좋은 기회가 생겨 프랑스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현지인들의 자유로운 모습, 여행을 하며 들뜬 사람들의 모습, 압도당하는 듯한 예술품들에 근심으로 가득 찼던 마음의 방에 여유가 생겨 그 시기를 잘 극복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변두리 마을을 여행한 이 수필에 더욱 정이 가는 것 같다. 코로나가 끝나면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프랑스에 다시 가고 싶다. 건강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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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우 고등학교때 프랑스 교류 플그램이라니 멋져요! 저도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이유가 \'새로운 경험에 대한 설렘 및 두려움\' 인 것 같아요. 처음에 일본으로 여행갔을 때 경험이 잊히지 않네요. 작가님과 저의 생각이 비슷한 것 같은데 붕 뜬 느낌을 잘 표현했다고 하니 책이 더 궁금해 지네요 ㅎㅎ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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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밝은 밤 사인본(교보문고 랜선 팬 사인회 전용 상품) 작가 최은영 출판 문학동네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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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와 딸을 거쳐 내려오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딸은 대개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역시나 책에서도 그런 관계를 다루고 있다. 딸이라면 한 번 쯤은 느껴봤을 법한 감정들을 얘기하는데, 자극적인 내용 없이 정말 현실에 있을 법한 일들로 이야기를 구성해서 내 주위 사람의 인생사를 글로 읽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는데 누구보다 끈끈한 관계로 맺어지는 천륜이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어디있으며, 나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식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엔 여러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해서 마냥 책이 반갑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회의적이었다. 사실 살다 보면 주위에서는 이러한 관계에 회의적이라기보다는 ‘그래도 가족인데,’ 라는 생각을 더 많이 듣게 된다. 하물며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책에서는 그러한 일종의 체념이나 수용의 태도 대신 자신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러면서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꺾이지 않고 다시 제자리도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해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생기겠지만 다치거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듬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의 전개는 작가의 물 머금은 듯한 명도에 내 경험으로 암도를 높여가는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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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이 사는 세계 작가 헨리 페트로스키 출판 서해문집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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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동안 책의 내용에 집중했지 책 그 자체나 책장에 주의를 둔 적은 없는 것 같아 이를 꼬집는 서문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또 그 동안 도서관의 존재에 대해서 당연히 여겼고, 배운대로라면 도서관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존재했으므로 친숙한 공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800개 이상의 수도원이 폐쇄되었으며 그 결과 800개의 도서관이 사라졌다."는 문구를 읽고는 책과 책을 모아둔 공간이 과거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실 책은 내내 어떠한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책과 책이 잠들어 있는 세계를 조망할 뿐이다. 두루마리에서부터 사슬에 달린 책, 선반에 놓인 지금의 책까지, 책 이야기가 죽 늘어져 있다. 처음에는 관심도 없고 지루하기만 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고 잔잔히 흥미로운 사실들이 계속 이어져 크게 어렵지 않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사실 평소에 메타포나, 상상이 많이 들어가는 소설 위주의 책을 좋아해서 논픽션을 읽는 것 자체게 조금 어려운 도전으로 느껴졌었다. 친숙한 책을 매개로 논픽션의 세계에 조금이나마 발을 들인 것 같아 조금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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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이 사는 세계는 다른 북토크 서포터즈분들도 서평으로 많이 적어주셨기 때문에 여러 북토크 서포터즈 분들이 써주신 서평을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한 것 같습니다ㅎㅎ 책 서평 마지막에 적어주신, 친숙한 책을 매개로 논픽션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표현이 정말 참신해요! 서평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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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코의 미소 작가 최은영 출판 문학동네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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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허영심, 공명심... 허울에 불과했다.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는 정말 절실해, 같은 말들을 하는 사라믈 속에서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마으이 비린내를 맡았다. 내 욕망이 그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항상 꿈을 선택하는 기로에 놓일 때면 끝없는 고민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을 때와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했을 때. 내 경우에는 두 가지가 양립 불가능했다.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하면 내가 내 손으로 꿈을 놓았다는 자괴감이 나를 덮친다. 반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다면 안정적인 미래를 포기한데다가, 항상 존재하는 '나보다 잘난 사람'에 대한 자격지심에 허우적댈 것이다. 그래서 재능도 없는 꿈에 매달리는 소유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리고 가면을 쓰고서 결국 꿈을 포기한 쇼코의 모습도 내 모습 같아서 읽는 내내 기분이 묘했다. 소유가 증오할수록 벗어날 수 없게 된다는 말을 했다. 어떤 일에 아예 무관심하면 증오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텐데 결국 어떤 것에 집착을 해서 그게 증오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니까 감정의 수렁에서 발버둥쳤을 쇼코와 소유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어지는 단편 <씬짜오, 씬짜오>에서도 쇼코와 소유의 관계의 연장선상에 놓인 듯한 말들이 나온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 마다 누가 남는 쪽이고 누가 떠나는 쪽인지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누군가이며, 떠나고 남는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하는 상대를 보면 아파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안도를 하고, 비겁하게도 상처를 받기 싫어 먼저 상대를 찌른다. 끝내 모두가 상처받는 걸 알면서도 관계를 시작한다. 쇼코와 소유의 관계에서 싸움을 피하려다 무너진 피해자들은 있지만 가해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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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은영 작가님의 책을 한번쯤 읽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멋진 서평을 써주셨네요~ 쇼코의 미소는 제목만 들어봤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을까 항상 궁금해했는데 이 서평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하고 갑니다~
  • 1984(세계문학전집 77) 작가 조지 오웰 출판 민음사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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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주의의 심볼

    중학교 3학년 영어 교과서에 <1984>의 텔레스크린이 '과거의 사람들이 예측한 미래의 발명품' 이라는 주제로 소개되었다. 해저 2만리와 같은 소설들도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건 바로 <1984>의 텔레스크린이다. 난 사생활을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데 사생활 이라는 것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발명품이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으로 치면 마치 CCTV가 욕실, 침실 등 모든 곳에 붙어있는것이라고나 할까. 또한 판옵티콘이라는 감옥의 형태를 일반 건물에 적용한 것도 굉장히 놀라웠다. 소설 속에서 확고한 전체주의 체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들 중에 대표적인 두가지가 텔레스크린과 파놉티콘이라고 생각한다. 시선이 권력이 되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감시하는지 아닌지 몰라서 스스로 움츠러들게되는 것. 따지고 보면 지금도 그렇다. CCTV가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특히 소설 속 오세아니아에서는 시선의 권력이 사회를 규정하는 특징이 되어버렸다.

    -최후의 인간

    그리고 여기서 윈스턴과 프롤들에게 주목하고 싶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최후의 인간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난 다르게 생각한다. 전체 인구의 약 85% 차지하는 프롤들. 난 윈스턴이 아니라 프롤들이 최후의 인간이자 가장 강한 계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물질적으로나 권력만을 생각하면 프롤들은 밑바닥과 다름없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만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만 있다면 그들은 가장 강력한 집단이 된다. 또한 내외부 당원들과 다르게 그들은 사랑을 할 수도 있고 노래를 자유롭게 부를수도 있다. 그들을 하찮게 여겨서 덜 억압하는 것이지만 전체주의의 체제 안에서 가장 자유로이 사는 그들이 가장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신어

    또 '신어'라는 것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언어는 역사와 문화가 뒤섞여 만들어진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유산을 '신어'라는 명목하에 스스로 없애다니. 옛날에 일본이 조선에 행했던 악행 중에 한국어를 못쓰게 한 것이 퍼뜩 떠올랐다. 정신 개조라는 명목 하에 행했던 것이 소설과 아픈 우리의 역사에서 비슷하게 나타나서 소름이 끼쳤다.

    -101호실

    윈스턴과 줄리아는 배반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결국 배반했다.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각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신념을 강요하다니. 나는 책을 읽는 내내 101호실은 사형장의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보면 사형장이 맞긴 하다.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신념과 생각을 빅브라더에게 충성하는 신념으로 바꾸는 것이니 본 자아가 사형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101호실은 정말 끔찍한 것 같다.

    -조지 오웰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조지 오웰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어서 처음에는 단순히 저 그림이 진짜인가 싶어서 찾아봤다. 검색했더니 조지 오웰의 대표작이 나왔는데 <동물농장>도 조지 오웰이 쓴 책이라고 한다. <동물농장>은 나치를 풍자하는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데 오웰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썼나보다. <1984>를 완성한 해는 1948년도라고 한다. 오웰이 1차 세계대전을 겪고 전체주의의 부패를 미래에 경고하는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말이 책의 초반부에 나왔다. 맞는 말인 것 같다. 빅브라더는 현재의 권력을 휘어잡아 과거를 입맛대로 고쳤다. 후손들은 모조리 뒤바뀐 그 기록들이 진짜라고 믿을 것이다. 빅브라더의 독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또 그들이 바꾼 현재와 과거는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이중사고와 정신개조를 통해 미래까지 바꾸려고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책 내용이 이 문장을 상기시켜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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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를 읽으셨다면 다음으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권합니다. 두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다르지만, 비교하며 읽으면 느끼는 바가 더욱 클 거라 생각합니다.
    • 조지 오웰의 1984... 옛날에 정말 좋아하던 책인데 여기서 보니 너무 반갑네요. 책 속에서는 충격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모습이 지금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회가 된 것에 놀랐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많이 읽히지만 1984는 그만큼 읽히지 않아서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동물농장만큼이나 흥미로운 책인데도 말이죠. 자세하게 리뷰 남겨주셔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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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에 대하여(오늘의 젊은 작가 17)(양장본 HardCover) 작가 김혜진 출판 민음사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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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척'당하는 '성소수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성소수자들에 관한 책들은 많이 읽어봤어도 그들에 관한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특히 성소수자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그 어머니에 대한 관점이어서 더 궁금했던 것도 있다. 사회가 개방적으로 변해간다고는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 뿌리 깊은 곳에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있는게 현실이다. 지지한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성소수자들을 지지한다.

    책에는 레즈비언 딸과 그 딸을 둔 엄마, 딸의 애인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딸은 서른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직업조차 없으면서 성소수자 운동을 한다며 엄마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요구한다. 심지어 애인마저 엄마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런데 엄마는 아직 동성애자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상태다. 이 상황에서 딸이 무책임하게 엄마에게 지원을 바라는 것이 정말 철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성인이라면,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지고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딸이 좋은 남편 만나 아들 낳고 오손도손 사는것이 바른 삶이고 딸의 삶으로서 자신이 딸에게 들인 시간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내가 아직 엄마가 되어보지 못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타인의 인생으로 자신의 인생을 보답받으려는 것이 참 이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딸을 낳겠다고 '선택'한것이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딸을 기르는 것인데 왜 보상을 받으려는 건지 모르겠다. 해야하는 일을 한 것 뿐인데. 난 성소수자는 아니지만 그들을 이해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성이라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라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이 동성인 것이다. 물론 좋아하는 이유에 그 사람이 이성이고, 나에겐 없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매력으로 느껴지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 그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姓향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어느 SNS에서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상대가 여자, 남자라서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상대가 여자, 남자라서 사랑을 우정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한다. 내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나도 동성을 사랑하고 있을 수 있다. 만약 내 아들 혹은 딸, 친구가 동성애자라면 그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차별받지 않는 삶을 살길 원할 것이다. 그렇게 내 주위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면 어느 샌가 사회는 조금 더 온기가 느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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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저 또한 누군가를 무의식적으로 다르게 인식한 적은 없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글이네요. 성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완전히 뿌리 뽑히기에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사회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이런 인권 문제에 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김지혜 작가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도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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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소수자들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하는 내용입니다. 사회의 소수자가 된다는 것은 참 힘든일 일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딸을 받아들이고 생활하는지 그 방식이 궁굼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 자살가게(양장본 HardCover) 작가 장 텔레 출판 열림원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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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어도 열 명이 내 죽음을 진심으로 기릴 수 있는 삶을 살기.’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간 장례식에서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내 마지막 꿈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열 명만이라도 나를 기억해준다면 그것만큼 안온한 죽음이 없을 것이라 매번 생각한다. 그 열 명은 모두 나를 사랑해야 한다. 어떤 사랑의 형태든 상관 없다. 우정, 존경, 열정 등. 사람들이 문득 세상에 없는 나를 떠올렸을 때 아,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었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었지 하고 한 번쯤 곱씹어 줬으면 한다. 문득 일어나서 목적도 없이 나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나를 기억해 줬으면 한다. 텅 빈 느낌이 때로는 그들을 엄습할지라도, 나를 생각하며 공간을 채웠으면 좋겠다.

    내가 어렸던 탓일까, 모두 검은 옷을 입고 눈시울을 적시는 것을 보며 장례식은 사실 죽은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죽은 사람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생전에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좋아하는 음식을 나누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례식이 죽은 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을 위한 의식이라고 여겨졌다. 눈으로 본 장례식은 온통 검었으며, 그래서 내가 처음 살갗으로 느꼈던 죽음은 ‘검은색’이었다. 내게 있어 죽음은 태어나서 처음 목으로 넘기는 뿌연 모유를, 삶의 반직선을 선분으로 매듭짓는 지점에서 검은색으로 들이키는 그림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니면 검고 끈적한 액체가 가득한 욕조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 그림이거나.

    그럼에도 나는 잘 죽기 위해 산다고 생각한다. 또 행복은 잘 죽는 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최상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각자의 삶이 다채로운 것처럼, 죽음도 다채로운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린다.’ 어찌 보면 반의어로 보이는 두 단어이지만, 내게 있어 두 단어는 동의어에 가깝다. 나는 내 삶과 죽음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매 순간 나를 세상에 던지려고 노력한다. 계(系)의 중앙에 ‘나’라는 별을 두고 천체가 나를 중심으로 공전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이 천체 안에서 중앙의 별은 오직 나다. 나는 천체의 중심으로써의 일을 한다. 가슴이 끓는 일을 하려고 하고, 순간을 즐기려 노력한다. 다양한 감정들은 내 혀 끝에서 터지는 건전지가 된다. 입 안 가득 행복을 담은 파란색, 질투를 담은 빨간색, 우울한 회색,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검은색, 애정을 담은 분홍색. 형용하기 어려운 각각의 빛깔을 담고 있다, 어떤 색이더라도, 나는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 차곡히 쌓아 음미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별’다운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 죽음에는 크게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의에 죽거나, 타의에 죽거나. 전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태어남을 스스로 정하지 못했으니 죽음은 스스로 정하고 싶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주도적으로 삶을 끝내려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는 것과 죽고 싶다는 것이 동의어는 아니다. 삶을 그만두어 모든 것을 멈춰버리고 싶은 거다. 이 상황을 더 이상 감내해 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건 타살에 가깝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가 죽음을 실패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거다. 목숨을 끊고 싶은 것이지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죽음의 두려움이 그들을 마지막 순간에 잠식해 버린 것이다. 나는 그들의 용기가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철망을 탈출하는 표범을 막지 못할 거라면 철망을 없애버리자. 그들은 목숨을 걸고 마하의 스피드로 달린다. 표범의 우울한 눈빛은 서늘하게 우리를 응시한다. 사살당한다 할지라도, 표범은 우리를 탈출한다. 그들은 죽음에게 절대 잡히면 안 된다. 사방은 까맣지만 그들의 눈은 형형히 빛난다. 그러나 도착지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헤맨다. 서글프다. 나는 우리에 갇힌 표범이 되어 철망을 탈출하는 표범들을 볼 때마다 안락함과 배덕함을 동시에 느낀다.

    표범을 죽을 때까지 표범이어야 한다. 유려하게 바람을 가르고 자유롭게 달려야 한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신이자, 신도여야 한다. 그들의 죽음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표범에게 경제적 규칙을 운운해 그들의 고고함에 상처를 내는 것 같지만, 차라리 자살을 성공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자본주의’가 죽음에도 적용되어 있으면 좋을 텐데 싶다. 예컨대 자살 용품을 파는 상점처럼 말이다.

    파리의 골목에는 가문 대대로 자살 용품만을 판매해온 상점이 있다. 가문 사람들의 핏속에는 자살의 넋이 흐른다. 상점 안에는 청량음료 대신 독약이, 샹들리에 대신에는 영안실용 조명등이, 우아한 나이프 대신에는 동맥 절단용 면도날과 할복자살용 단도가 있다. 그들이 운영하는 가게에는 유구한 고전적 자살 도구에서부터 기발한 자살 방법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관한 모든 상품이 총망라되어 있다. 완벽한 죽음을 위한 백화점이 따로 없다.

    죽음에 대해 모든 것을 갖춘 ‘자살가게’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십오만 명이 자살 시도를 하는 가운데 무려 십 삼만 팔천 명이 실패를 한다.
    죽지 않는다면 전액 환불!”

    그들은 죽음을 완벽히 자본으로 여긴다. 죽음까지 자본으로 다뤄진다. 허망하다. 자조적인 웃음을 짓게 만든다. 누군가에게는 미소가, 누군가에게는 조소가 되겠지만. 나는 자조적으로 웃고 만다. 이 웃음은 곧 조소로 변한다. 죽음을 통해 번영해 온 이 가문이 변화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뿌연 모유를 들이킨 것이다. 막내아들 알랑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핏속에 자살의 넋 대신 행복이 흐른다. 삶을 장밋빛으로 보면서 인간의 고질적인 고뇌를 달랜다. 사람들의 죽음을 먹으며 승승장구해온 이 가업은 알랑을 통해 ‘끔찍한’ 삶의 희열과 마주친다.

    가족들은 삶의 희열을 견딜 수가 없어 알랑을 군인학교로 보낸다. 알랑이 집을 비우는 동안 어느덧 가족은 그의 존재를 그리워하게 되고, 이제 그가 돌아왔을 때 자살가게는 희망을 파는 가게로 둔갑한다. 알랑은 가족들이 행복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을 본다. 자신의 숙명을 이뤄냈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가족들 앞에서 투신한다. 투신은 그가 성공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자살의 띠를 끊어낸 마지막 자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살로써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완벽했다. 처음에는 태양계라고 인정조차 할 수 없는 명왕성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가족들의 태양이 되었고, 반짝반짝 빛을 내는 별이 되었다. 그의 삶의 반직선이 선분으로 끝맺는 날은 누구보다 난만하고 찬란했다. 멋진 죽음이었다. 행복을 잠깐 맛보게 해주고, 가족들에게 씻기지 않는 죽음의 트라우마를 남겨주었다. 행복을 알기 전 가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었겠지만 지금은 절망 그 자체이다. 알랑은 완벽한 표범이었다. 작고 왜소한 소년의 그림자는 날렵하고 검은 표범일 것이다. 반절밖에 없었던 표범의 그림자는 땅바닥에 추락하며 완전한 형태를 갖춰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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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말은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정반대의 개념인 \'삶\'과 \'죽음\'을 동일선상에 놓다니.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쉽게 이야기하지 않을 뿐입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언젠가 죽습니다.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생각할 수 있을 때 생명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완성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대한 훌륭한 문학적 묘사와 죽음을 통해 바라본 삶의 자세가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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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는 책인것 같아요. 과연 내가 죽으면 진심으로 슬퍼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삶을 살고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듭니다. 많은 관계보다는 소수의 진중한 관계를 만드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페스트(세계문학전집 267) 작가 알베르 카뮈 출판 민음사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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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반복되는 주기가 있다고들 말한다. 누구도 무엇이 어떻게 되풀이 될 지는 모른다. 페스트가 어쩌면 코로나로 돌아온 것처럼 말이다. 폐쇄된 도시에 격리된 주민들은 극한의 절망을 마주한다. 내일을 그릴 수 없는 삶, 인간을 구원해주지 않는 신, 치유 없는 의학, 이타심의 탈을 쓴 이기주의. 특히 사랑이란 미명 아래 팽배해진 이기주의는 신체뿐만 아니라 인간의 당위와 실체에도 출혈을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아래서도 주민들의 ‘삶’을 위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러한 인간의 의지를 보며, 재앙에 대한 태도를 재정비하고,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는 질병을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자랐다.

    등장인물들은 각 계층의 대표성을 띈다. 서술자이자, 중심인물인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페스트에 앞장서서 맞선다. 리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어떤 여자가 죽는 순간에 ‘안 돼!’라고 외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나는 있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어요. 죽음에 익숙해질 수는 없다는 것을요. 그때는 나도 젊어서 내가 세계의 질서 자체를 혐오한다고 생각했지요. 그 후에 한층 더 겸허해지긴 했습니다. 다만,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더군요.” 이 말을 읽고 의사의 직업적 숙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초반부에서는 환자들에게 병명을 통보하고 돌아서는 리유의 모습이 냉정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평정을 잃고 외치는 모습을 보고 그도 페스트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파늘루 신부와 죄 없는 아이가 페스트에 대한 고통으로 몸을 비트는 모습을 보여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부분에서는,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기 위해 직업을 선택했으나 누구보다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봐야 하는 절망감과 무력감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래서 페스트가 끝나고 사람들이 해방감을 맞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유만은 고독하게 제 자리로 돌아간 것 같다. 사람들은 제각기 그 속에 페스트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리유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스트 전의 삶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리유는 끝까지 페스트에 반항하고, 겉으로만 보이는 평화에 반항한다. 반항의 아래에는 ‘긍정’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긍정은 희망과, 이겨낼 수 있다는 의지이자, 행복에 대한 조바심이다. 작가 카뮈는 ‘Cogito ergo sum.’을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로 해석한다. 생각이 반항으로 바뀌고, 그 주체는 ‘나’에서 ‘우리’로 바뀌었다. 그래서 내겐 리유가 카뮈의 거울이자 또 다른 자아로 비춰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이자 나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던 인물은 페스트로 인해 오랑에 발이 묶여버린 무용수 장 타루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가피한 이기주의를 보여주는 대신 보건대를 꾸려 최선을 다해 페스트와 맞선다. 누구나 기피하는 일을 도맡아 묵묵히 할 일을 해내는 모습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리유와 달리, 그는 의무감을 지닐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의무감 없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에 뛰어든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다가 책의 후반부에 리유와 타루가 페스트에서 도망쳐 잠깐의 해방감을 만끽한 시점에서 타루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의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점잖은 방법으로 살인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판사로써 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고, 그런 것들을 자랑스레 여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타루는 방황한다. 결국 그는 자유로운 무용수로써의 삶을 산다. 그 과정에서 오랑에서 페스트를 만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죽음에서 사람들을 멀어지게 한다. 페스트에 감염되자 자신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페스트가 끝나갈 무렵 다들 해방감과 다시 원래의 삶을 되찾을 수 있다고 희망을 가졌을 때 죽음을 맞이한 터라 더욱 비극적이었다. 타인의 죽음에는 날이 서 예민했던 모습을 보였던 그이지만, 정작 자신에게 닥친 일에는 덤덤하게 반응하는 타루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그렇게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삶을 산 이유가 단순히 아버지의 직업적 소명 때문임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분명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 형별을 받아들여야 한다.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피해를 입히고 사회의 규범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타루의 입장에서 고민하다가, 사회의 규범과 그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연 국가가 목숨으로써 심판을 내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회의 구성원 전부가 참여해 결정하지도 않은 사회의 규범은 누가 만들었나? 법은 사회의 안정성을 위함인데 범죄자도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사회의 구성원이지만, 범죄를 저지른 이후에는 법의 테두리 안에 있기를 자의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사회가 범죄자를 지켜주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파늘루 신부는 덕망 있는 오랑의 종교 인사이다. 처음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이러한 시련은 신을 믿지 않고 죄를 사함 당하지 못해 신께서 내리신 벌이라고 열정적으로 설교한다. 이 부분이 특히 오늘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을 때,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한다. 물론 거기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다시금 의지를 서로 북돋는 것은 필요하고, 일시적으로 사람들에게 안정을 찾아주는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설교의 내용은 의문스럽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죄를 지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어린’ 아이들이다. 순진하고 완전무결하다.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있던 종교에 대한 의문점을 책에서도 그대로 담고 있다. 심지어는 의심마저 불러온다. 파늘루 신부는 누구보다 독실했으나, 페스트에 걸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목도하고 태도가 바뀐다.
    “내가 증오하는 것은 죽음과 불행이라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든 원하시지 않든 간에 우리는 함께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하고 그것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느님조차도 이제는 우릴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파늘루의 원래 말 대로라면, 죽음과 불행마저도 신이 우리에게 내리는 형별이기에 달게 받아들여 죄를 씻김당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를 증오한다고 말한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서 확고한 결의가 느껴졌다. 평생을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 살아왔던 사람이, 눈 앞의 어린아이를 보고 자신의 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위해 결단을 내리는 태도는 가히 존경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파늘루는 결국 페스트로 죽어갈 때 의학을 거절한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으로 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절망적으로 손에 십자가를 그러쥔 채, 죽음 자체는 무관심하다는 듯 숨을 거둔다.

    내가 조망한 세 인물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반항한다. 리유는 눈속임과 같은 평화로움에 반항하고, 타루는 정의를 위해 왕도에 반항한다. 파늘루는 심지어 자신의 신념과 생에 반항한다. 이성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추상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옳은’ 행동들은 사람을 살린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는 오랑의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하지만, 결국 오랑을 떠나지 않는다. 그동안 이 도시를 탈출하겠다는 맹목이 사랑을 압도했으며, 이곳을 떠난다는 것이 곧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덧붙여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책을 읽으며 나는 랑베르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코로나를 경제적 논리로만 따져보았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서 회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언뜻 보기에 전 세계를 팬데믹으로 몰아넣은 이 질병은 나와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스스로를 출구 없는 터널로 몰아넣는 것과 같다. 페스트를, 코로나를 물리치기 위해 매일을 성실히, 진심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코로나에 대응하기 위해서 최전방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그러한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일상을 되돌려주기 위해 밤낮없이 매달린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써 누군가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합리에 반항하고, 희망에 긍정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제를 보고, 오늘 반항하여 밝은 내일을 그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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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을 보면서 정말 놀랐습니다. 페스트라는 책에 정말 집중하여 온몸으로 책을 읽으신 것 같다는 생각을 받았어요. 리유와 타루, 파늘루 신부를 보면서 저도 많은 생각이 드네요. 특히 리유에 대해 서술해놓으신 부분을 보니 제가 본 다큐 하나가 생각나요. 다큐는 수의사에 관한 것이었는데요, 동물을 살리는 일을 하는 수의사가 동물이 엄청나게 다쳐 회생불가능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동물에게 직접 안락사 주사를 주입하는 장면이 나왔었는데요. 그 수의사 분은 이럴 때마다 수의사로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든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 장면에선 저도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페스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코로나 이전의 삶은 되찾을 수 없다는 현재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리유나 타루, 파늘루 신부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페스트에 묵묵히 맞서서 싸웠던 것처럼, 저도 저만의 방식으로 위기 상황이 왔을 때 저만의 방법으로 묵묵히 맞서서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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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노볼 드라이브(오늘의 젊은 작가 31)(양장본 HardCover) 작가 조예은 출판 민음사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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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스노볼 속 세상은 한없이 평화롭고, 잔잔하기만 하다. 그 밖의 세상은 아무렴 상관이 없는 듯이. 그러다가 누군가 손을 들어 스노볼을 흔들면 그 세상은 한순간에 눈보라가 인다. 그 밖의 세상은 아무렴 상관이 없는 듯이.

    소설 속에서 현실과 가장 다른 것은 역시 녹지도 않고 내리는 눈이다. 이런 디스토피아에서 ‘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곳에서의 눈은 재앙이다. 그러나 실종된 이모를 찾아 나서는 ‘모루’는 재앙 속에서도, 순백의 깨끗하고, 조용한 눈에 애정을 가진다. 무너진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을 앗아간 눈에 애정을 가지는 모습이 결핍되어 보였다.

    이모 ‘유진’은 삶이란 모를수록 행복하고 알수록 불행한거라고, 듣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모루에게 그건 복 받은 것이라며 최대한 오래 무지하라고 한다. 그동안 나는 무식은 죄가 아니지만 무지는 죄라고 생각했다.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고 확고히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족이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알지 못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얼마나 좁고 깊은 마음일까 싶었다. 그래서 눈에 애정을 가진 모루의 모습이 점차 결핍과 같이 뒤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는 곧은 심지로 느껴졌다.

    햇빛이 눈에 반사되어 따갑게 눈을 깨물 때, 이월과 모루는 서로에게서 서로를 본다. 모루는 이월을 온 마음을 다해 이해해보려고 했으나, 난 진실과 속내를 숨긴 이월이 의뭉스러웠다. 그러나 수 년이 흐른 후에도 모루가 꺼낸 한 마디를 지니고, 유진의 품을 그리는 이월을 보니, 그저 황폐화된 세상 속에서 아직 속은 어리지만 겉만 훌쩍 커버린 어른아이가 보여 그가 느꼈을 우울과 고독이 전이되었다.

    글을 읽다보면 모두의 정체성이 모호하게 느껴진다. 중성적인 이름들, 특정 성을 구분할 수 없는 행동들, 날렵하게 찢어진 눈매와 같이 비슷한 외형들. 그래서 과거와 현재의 기억들이 얽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막막한 결말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주인공들에 어떤 상황을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다. 크게는 팬데믹, 가깝게는 독자 각각의 불안했던 10대나 20대. 우리는 우리여서 불안정한 것이 아니라 그저 10대, 20대기에 미완전한 것이라는 생각이 소설을 읽는 내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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