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단편집 중 <황제의 전갈>이라는 짧디 짧은 글이 있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2장 남짓이다. 나는 그 짧은 글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었는데, 왜 내가 글을 읽고 이런 기분이 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무슨 감정인지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황제가 일개 개인인 '나'에게 죽기 전 보내온 전갈. 도대체 얼마나 중요하길래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확인하고 죽기 직전 온 힘을 다해 사자를 보냈을까. 비천한 신하, 황제의 태양 앞에서 가장 머나먼 곳으로 피한 보잘것없는 그림자에게, 바로 그런 '나'에게 황제가 임종의 자리에서 한 가지 전갈을 보냈다. 그 내용을 아는 사람 중 살아있는 자는 사자뿐이다. 사자는 가장 깊은 내궁의 방들을 힘겹게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고, 뜰을 지나고, 제2의 궁전을 지나 나의 문으로 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내궁의 방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설령 그 방들을 벗어난다 해도 아무런 득이 없을 것일진대, 이는 그가 내궁의 방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뜰을 헤쳐나가지 못할 것이며 왕도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이 거대하고 위대한 궁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황제가 죽기 직전이 아닌 생명력이 충만했던 시절로 시계를 돌려보면, 태초에 태양과 그림자가 서로 즐거이 뛰어놀던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그림자가 태양을 등지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림자는 태양이 지배하는 제국의 왕도에서 쫓겨나 가장 구석진 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 태양이 지는 때가 왔다. 그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그림자에게 말을 전한다. 사자를 통하여. 태양과 그림자, 빛과 어둠은 삶과 죽음 만큼이나 '양분'되어 있는 것이므로 그들의 사이에는 제3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태양의 세계에 살던 사자는 그림자의 집에 도달할 수 없다. 황제의 전갈은 영영 전해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의 전갈은 무엇이었을까? 곧 태양이 질 테니 너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내용이었을까? 혹은 태양이 없으면 그림자도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을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황제의 죽음과 '나'의 생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림자는 태양이 죽어도 계속해서 살아있다. 둘은 한 몸이지만 한 몸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들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자도 도달하지 못하는 '나'의 문인데, 어째서 '나'는 황제가 죽었다는 것을, 심지어는 황제의 전갈이 본인에게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선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사실 태양과 그림자는 '양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는 침전물이 높다랗게 퇴적된 왕도가 놓여있다. 하지만 태초에 그 둘은 하나였으므로 사자 따위는 애초부터 필요 없었다. 너무 오래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잊고 있었을 뿐. 그러니까, 애초부터 황제는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나' 역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이뤄지지도 않을 희망을 품고 사자를 기다리는 것일까? 어째서 다른 것이 오고야 말리라 믿는 것일까?
왜냐하면 희망은 본디 허상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그 어떤 유형의 것도 아니고, 언어의 형태로 전승되는 것도 아니다. 희망은 그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는 상태 그 자체다. 그러므로 황제가 우리에게 보낸 결코 닿지 않는 전갈은 희망이다. 태양의 마지막 유언 한 마디는 사자를 끝없이 달려나가게 할 것이고, 그것은 그림자가 매일 저녁 창가에 앉아 촛불을 켜둔 채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게 하는 힘이다. 그것이 한 몸이던 태양이 죽고 나서도 그림자가 영영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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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단편집 출판 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