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_사르트르, 인간은 무이기에 이러한 무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를 형성할 수 있다.
83p. 그 태양과 파란 하늘은 속임수일 뿐이다. 그것들에 백번은 넘게 걸려들었다. 내 추억들은 악마의 지갑 속에 든 금화와도 같다. 지갑을 열어보면 낙엽밖에 들어 있지 않다.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한 대상을 의심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작열하는 태양과 쳐다보노라면 내가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느끼게 되는 광활한 하늘을 속임수라고 칭하는 데에는, 로캉탱, 혹은 사르트르가 패기를 넘어 오만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를 속임수라 칭하는 것을 만용으로 느끼는 내가 그것들에 이미 걸려든 것일까. 지나간 내 추억들은 천사의 지갑에 든 낙엽이 되는 편이 좋을까, 악마의 지갑 속에 든 금화가 되는 것이 좋을까. 내가 추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언제까지 금화로 남아있어 줄까. 나는 무심코 열었을 때 낙엽으로 변한 추억일지라도, 그 낙엽을 보면서 사색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자 한다.
95p. 먼저 시작은 진짜 시작이어야 했다. (중략) ...갑자기 나타나면서 권태를 멈추게 하고, 시간을 단단하게 만드는 진짜 시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일어났어.’ 라는 생각이 든다. 즉시 우리는 이것은 그 전모가 안개 속에 잠겨 있는 어떤 커다란 형태의 전조임을 깨닫고는 ‘뭔가가 시작되고 있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이러한 진짜 시작을 찾고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은 그리 동감하지 못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진짜 시작’이라고 마음을 다잡고 어떤 일에 골몰했을 때보다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끝에 가보니 어떤 우연함이 진짜 시작이 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스럽기는 하다만. 어쩌면 <구토>를 읽고 자판 앞에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 이 순간이 어떠한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201p. 그는 결코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무언가에서 즐거움을 느낄 때에도 “조금 쉬는 거야”라고 말하며 절제하고 즐겼을 것이다. 이렇게 그에게 있어서는 쾌락도 권리들 중의 하나가 되면서 그 위험한 무용성을 상실했다.
사르트르는 이를 비판하지만, 내가 지향하는 모습이다. 끝없는 절제와 한계에 대한 도전은 존경스러워 보인다. 의무를 이행했을 때 보상처럼 느껴지는 쾌락과 언제든지 박탈 당할 수 있는 권리가 동의어가 되다니. 위험한 무용성을 상실한다는 말 뒤엔, 잘 벼려진 검과 같이 언제든 최고의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 숨겨진 것 같다.
204p. 경험은 죽음에 대한 방어물 이상이라는 것을, 하나의 권리, 늙은이들의 권리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234p. 여기에는 끝이 없다. 이게 다른 무엇보다도 고약한 것은, 내게 책임이 있고, 내가 공범자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존재한다라는 일종의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을 유지하는 것은 나다. 바로 나다.
<자살가게>라는 책을 읽고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나는 공범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로캉탱도 같은 생각을 한다.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부정할 수 없는 존재인 내가 있다. 그래도 ‘나’는 존재한다. 생각을 멈추려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281p. 독학자가 말한다. “한 인간을 그런 식으로 한정 지을 수 있나요? 그가 이렇다, 혹은 저렇다 라고 말할 수 있느냔 말입니다. 누가 한 인간의 의미를 고갈시켜버릴 수 있나요? 그 누가 한 사람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습니까?”
295p. 구토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를 빨리 떠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병이나, 일시적인 발작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299p. 우리는 자기 자신에 거북해하고 당황해하는 무수한 존재자들이었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각 존재자는 당황해하고 막연하게 불안해하면서 스스로가 다른 존재자들에 대해 쓸데없이 더해진 존재라고 느끼고 있었다. 쓸데없이 더해짐. (중략) 그것들 각각은 내가 그 안에 가두려 하는 관계들에게서 벗어나고 고립되고 넘쳐나고 있었다. 이 관계들은 모두가 자의적으로 느껴졌고, 더 이상 사물들과 맞물리지 않았다.
320p. “난 단지 자기가 존재하고, 변하지 않는 게 필요해. 자기는 파리나 그 근방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는 백금으로 된 미터자와도 같아. 그것을 실제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안니의 말은 잔인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는 존재는 어떤 것일까 싶다. 실제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사무친다.
357p. “불쌍한 사람! 참, 운도 없지. 처음으로 자기 역을 잘 연기했는데, 상대는 고마워할 줄도 모르니 말이야. 자, 이제 가.”
안니가 로캉탱에게 작별을 고할 때 한 말이 자조적인건지, 로캉탱을 향한 말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둘 모두에게 연민을 느낀다.
고등학생 때 사르트르의 사상을 배웠다. 대학에 입학해서 <데미안>과 사르트르, 데카르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엮어서 발표를 한 경험도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철학자이자 가장 어려운 철학자였다. <구토>는 성인이 되고 읽은 책 중에 가장 어려웠다. 로캉탱은 우울증 환자 같다가도, 편집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가도, 삶에 통달한 것 같다가도, 어린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생각의 흐름이 너무 느리다가,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독학자와의 식사, 안니와의 재회, 도서관에서 독학자를 감싸준 일. 특히 마지막에 독학자를 싸고 돈 것이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짧은 내 식견으로는, 그의 외로움을 이해한 것만 같다. 10년 후 쯤 읽으면 같은 대목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지금 이 사유를 통해 또 다른 지성의 조각을 모으고 싶다. 더 큰 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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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에디터스 컬렉션 10) 출판 문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