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에서 한아뿐 작가 정세랑 출판 난다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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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시간 만에 앉은 자리에서 읽었다. 소설이 가벼워서 생각할 거리가 크지는 않고 기분전환 용으로 좋다. 환경 문제 얘기가 가끔 나오는데, 작가가 의무감을 가지고 탄소 절감에 대한 얘기를 억지로 끼워 넣는 것 같아 흐름이 깔끔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도 뻔한 사랑 얘기 읽고 싶을 때는 딱이다.

    p44. 지구의 위선과 경선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태양을 받은 팔.

    어떤 팔인지 상상이 된다. 햇빛을 받으면 털이 희게 빛날 것 같은 강인한 팔이다. 그런데 난 정반대의 팔을 좋아한다. 허여멀건하고 창백해서 회빛이 돌고, 나만큼이나 얇은데 뼈는 단단하고 마디 굵은 팔이 좋다. 얇은 피부 위로 돋는 핏줄도 좋다. 초코칩 박힌 쿠키 반죽 같은 팔.

    p76. 이런 갑각류 같은 사람, 겉껍질 안쪽엔 부드럽기가 그지없었다.

    이 문장을 읽고 우리 과 친구가 생각났다. 처음 봤을 때는 얼음 공주인 줄 알았는데 정말 부드러운 친구다. 닮고 싶은 친구 중 하나다. 단단하고 심지가 곧다.

    p90. 한아가 기억하는 경민은, 언제나 공기를 자기만의 색으로 채색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도 되고 싶다. 덧붙여 누군가 나를 어떠한 색으로 생각해준다면, 기꺼이 그 색에 맞추어 살아가고도 싶다. 꽃에 비유하면 나를 장미 같다고 해주는 언니가 있다. 사실 난 장미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향기도 너무 짙고, 꽃의 여왕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다. 아파트 단지 울타리에도, 누군가 들고 있는 아무 꽃다발에서도. 난 그 언니를 보면 민들레가 생각난다. 그 언니가 웃으면 무장해제된다. 나는 노란 수선화를 좋아한다.

    p104.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우주를 건너올 만큼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내 사랑도 기꺼이 우주를 건너갈 수 있을 거다.

    p120. 몇 퍼센트나 망설였을까. 그 망설임 중에 또 얼마가 한아에 대한 망설임이었을까.

    입 안에서 ‘망설이다’라는 말을 굴려보니 문득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리저리 생각만 하고 태도를 결정짓지 못하는 마음. 망설임 자체도 애정이 남아있어야 가능하구나. 어쨌든 생각도 하고, 결정을 내릴 때도 힘겨워 하니까. 왠지 슬프다.

    p137. 내가 네 여행이잖아. 잊지 마.

    박준 시인의 산문이 생각났다. 네가 내 여행이고, 내가 네 일상이 되었던가, 그 반대였던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여행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상처를 덜 받는다. 여행은 소중함을 알기 너무 쉬운데 일상은 그렇지 않다. 데이는 사람은 여행을 떠난 사람이 아니라 일상에서 누군가 떠난 사람이다. 나는 욕심이 많아서인지 누군가에게 일상이 되고 싶다. 그 전에는 내가 특별한 여행이 되고 싶어했는데, 여행에서 일상으로 돌아오기는 너무나도 쉽지만 일상에서 여행을 택하기는 어렵다.

    p143. “보고 싶어.” 그 말이 자연스럽게 새어 나왔다.

    이건 최은영 작가의 <애쓰지 않아도>가 생각난다. 사랑은 굳이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니까, 자연스럽게 새어 나오는 보고 싶다는 말은 어디에나 펼쳐져 있는 사랑의 증거다.

    p147.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거지. 질량과 질감이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혼자 다 대신할 수는 없었어.

    맞다. 난 대신하고 싶어했고, 그럴 수 있다고 믿었었다.

    p175. 경민이 부드럽게 한아를 껴안았다. 중요한 결정을 언제나 한아에게 맡겨주는 게 좋았다.

    나도 내가 중요한 결정을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방향타를 잡고 있어도 결국 바다가 허락해줘야 항해할 수 있더라.

    p197. 언제나 너야. 널 만나기 전에도 너였어. 앞으로도 영원히 너일 거야. 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채 말하지 못했고 물론 경민은 그럼에도 모두 알아들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담기 벅찬 마음이 들 때가 있다.

    p204, 222. 떠나지 않았다면 내 평생이 모두 네 것이었을 거라는 잔인한 말 / 심장이 마지막 걸음을 할 때

    항상 생각하고 있던 말, 예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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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네 여행이잖아 라는 말을 보니 인생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을 가끔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제에 치여 살다보니 하고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 과제를 통해 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