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형태의 작별들로 심란했던 때, 이 책을 읽게 됐다. 앞부분을 읽는 내내 내 이야기도 아닌데 강한 심리적 동요를 느꼈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책장을 덮었다 폈다를 반복해야 했다. 글로만 읽는데도 눈앞에 그 장면이 선연히 보이는 것 같아서 눈을 찌푸리면서 읽었다. 영화라면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되겠지만 책은 그게 불가능해서.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십오 년 전, 한 노인은 바닷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바다에 던지는 것을 본 이후부터. 그 문단을 읽는 순간 프리모 레비의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자꾸만 '어떻게'가 떠올랐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그렇게 어린아이를 죽일 수가 있어. 어떻게 그토록 무지하고도 거대한 악을 저지를 수가….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겨울 제주에서는 총칼로 무장한 경찰과 군인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 보통의 일이었다.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주체성 없이, 생각 없이 저지르는 악은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는가.
아렌트에게 홀로코스트, 대학살은 인간성의 형이상학적 파괴였다. 이러한 국가적 범죄 행위의 주체는 인간이나 인간이 아니다. '근본악'이다. 아렌트는 오직 '인간만이 다른 인간을 용서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홀로코스트와 같은 범죄는 용서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어떻게 그런 일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망각하지 않고 뼈와 가슴에 새기겠노라 다짐할 수 있을까.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억해야만 한다는 말이 있다. '작별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 글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어쩌면 작별이 슬픈 이유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잘린 손발과 비행기 활주로 아래의 뼈를 보며 괴로워도 두 눈을 감지 않는 것. 3분에 한 번씩 손가락을 바늘로 찌르는 것. 그것은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는 그곳으로부터 온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승은 시인의 <굴절>이라는 시를 생각했다.
물에 잠기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친 곳은 없다는데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물속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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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출판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