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주토끼 작가 정보라 출판 아작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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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SF 류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며 오랜만에 문학계가 들썩이는 흐름에 나도 슬쩍 발을 담가보고 싶었다. 내가 여지껏 읽은 한국 SF 소설 중 단연 최고다. 대개는 자신이 외면하고 싶은 부분이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면을 투영하는 소설은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들의 흠결은 나와 닮았음에도, 모두가 쓸쓸하고 외로워서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맞게 되는 파국이 즐겁다. 작가가 건네는 말들은 날카롭고 아프지만, 그렇기에 위로다.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차갑다. 차가운 이들에게 갑자기 뜨거운 손을 가져다 대면 놀라 몸을 더욱 움츠린다. 그렇지만 같은 온도의 손길이 닿으면 안정감이 든다. 설령 그게 차가워도, 손길이 느껴진다. 그래서 날선 이야기로 위로를 건네는 이 책이 너무 좋다.

    p57.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 네게 부탁한 적이라도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도 따듯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었더냐? 너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태어나게 했고 이후에도 나를 혐오하고 역겨워하여 줄곧 없애고자 하지 않았느냐?

    이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마냥 철없는 중학생의 사춘기 투정으로 보이지만(실제로는 인간 배설물 덩어리다.), 난 절대 웃을 수 없었다. 물론 내 부모님은 나를 돌보아 주시지만, 나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나보니 그냥 그 사람들이 내 부모였던 거고, 태어나보니 내가 그들의 딸이었던거다. 내가 이들과 인연이 맺어져 평생을 함께하게 된 것은 같은 핏줄이라는 것. 그거 하나 뿐이다. 나는 그래서 항상 가족이라는 게 낯설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지 내가 ‘딸’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들의 딸이 아니라면 인정받을 필요도, 이유도 없었을 거다. 물론 그들이 나를 사랑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내 부모는 나를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에 나를 언제든지 내칠 수도 있지만, 그래서 연을 끊기 어렵기도 하다. 반면 부부는 남이었던 서로를 선택한다. 남에서 고작 점 하나를 빼서 님이라 여기며 평생을 함께한다. 점 하나로 갈린 운명인데, 거기에 묶여 평생을 함께하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따금 우습다. 무튼, 극단적으로 봤을 때, 나는 그들의 의지로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만약 자신의 배우자나, 나를 죽을 위기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그들의 사랑의 부산물일 뿐인 내가 내쳐질 것이다. 나는 선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p116. 그러게 애 아빠를 빨리 찾으라고 그랬잖아요. 남성 배우자도 없이 저 혼자 크게 내버려 두니까 결국 그렇게 된 거라고요.

    여자의 홀몸에서 태어난 아기는 핏덩이가 되어 사라진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은 그렇지 않다. 여자와 남자의 결합으로 아기가 생긴다. 그러니까 부모 중 하나 없이 크는 건, 혹은 혼자 크는 건 ‘결국 그렇게 되지 않는다’, ‘결국 그렇게 사라지는 건 없다’라며 이 소설을 읽는 누군가에게 서슬퍼런 말로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듯 했다.

    p143. 1호가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안녕, 내 사랑.
    설령 그 사건이 가짜여도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진짜다. 그래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거다. 가짜인 걸 알지만 서도 내 감정의 파동을 느껴, 나는 고장나지 않았다, 여전히 이 모든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는 것들을 증명하기 위해 그러기도 한다. 그래서 여자가 로봇을 사랑해, 그를 위해 한 일이 로봇에게는 그저 자신을 폐기처분 하는 그 ‘사실’ 이상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나보다. 로봇에게 사랑이란 그냥 전원을 끄면 사라지는 가짜니까. 인간의 모든 감정이 진짜인 것과는 달리.

    p230. 그리고 마침내 눈물이 멈추었을 때, 세상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그는 해가 뜨는 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야지. 몇 년 전에, 친구가 노무현 대통령님이 하셨던 말을 들려주며 나에게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물’같은 사람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문득 이 문장을 읽으니 그 얘기가 생각났다. 물론 내가 이 소년처럼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일어선다. 동쪽으로 흐르면, 다시 서쪽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한 번 밀려가면 다시 밀려오는 파도처럼.

    p287. 그 순간 물고기는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모래를 박차고 사막의 차가운 밤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별이 점점이 박힌 남빛 하늘 속으로 거대한 물고기가 뛰어드는 순간 유리처럼 맑은 밤하늘이 갈라지는 굉음을 공주는 분명하게 들었다.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서.

    p293. 태양과 달이 부서져 사라지는 날까지, 별과 구름이 손에 잡히는 이 무한한 공간이 모두 공주의 것이다.

    태양과 달이 부서져 사라지는 날까지, 별과 구름이 손에 잡히는 이 무한한 마음을 주고 싶다고 얘기해줄 사람.

    p305. 그러므로 언제나 지금보다는 조금 전이 가장 좋은 순간이었고, 앞날보다는 지금이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

    이 문장은 덤덤하다. 자신의 모든 순간을 제 3자처럼 바라보기에 할 수 있는 말 같다. 얼마나 인생에 미련이 없으면 이런 말을 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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