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p에서 언급하듯이, 진시황은 정사의 모든 부분을 관장했고 승상과 대신은 이미 결정된 일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장기적 정책부터 사소한 일까지 굉장히 신경써야할 부분이 많은데, 수많은 정사에 일일이 관여하며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 진시황의 정치에 대한 놀라운 열정과 꼼꼼함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용납이 되지 않는 지나친 완벽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열정을 갖고 통치했다는 점이 군주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갖춘 것 같다. 또한 37년간의 재위기간 중 5번이나 전국 순행을 했다는 점 역시 중앙집권제를 강력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진시황의 비결이자 엄청난 열정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렇게까지 노력하며 정치에 힘썼다는 것이 진시황이 군주로서 지닌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진시황이 갖춘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해보면 대단한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242p의 군현 설치 과정을 보면 당시 호족에게 각 지방의 통치를 맡기는 방식의 가장 큰 단점을 제물을 나눠주어서 호족들에게 혼란을 주는 방식으로 해결해내려 했다. 이후 진나라가 실제로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중앙집권제가 최초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 방식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볼 때, 기원전에 이미 중앙집권제의 기반을 닦고 실시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각 지방을 순행하면서 지방마다 비석을 세운 점이 인상적이었다. 본문에서는 새로 정벌한 지방이나, 순방 때 방문한 곳마다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비문이 쓰인 비석을 세운 내용이 여러 차례 나온다. 순행 이후에도 비석을 볼 때마다 계속 황제를 떠올리게 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통신시설이 없어서 지방에 미치는 황제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중앙에 비해 덜할 수 있는데, 이렇게 비석을 세움으로써 백성들과 관리들에게 황제가 여전히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황제의 위대함 역시 강조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그리고 262p에 등장하는 점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점 역시 진시황이 꽤 깨어있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국가의 대소사에 점술가의 말, 즉 하늘의 뜻을 반영하여 결정하는 문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나라의 경우에는 결국 최종 결정은 황제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당시 문화와 달라서 인상적이다. 그만큼 황제의 권위가 독보적이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
신주사기. 5: 진시황본기 출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